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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Sep 07. 2023

보고 싶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런 새벽을 보냈던 어느 날



2020년 09월 07일 20시


[서서히]

청명했던 여름하늘이
서서히 발갛게 물들어가던 날,

저무는 하루의 마지막엔
문득 보고 싶어 생각에 잠기던 서로가 있었다.

살결을 타고 흐르는 바람 따라
그 마음이 전달될까,
'보고 싶다'라는 단어 하나로
선선해진 새벽의 공기를 따스하게 만들던 우리가

오늘따라 그립다.





'그냥 이번 글은 이 주제로 써야겠다-' 생각하며 적었는데 적고 나서 보니 정확히 그날로부터 3년이 지난날이었음에 놀랐다. 특별한 우연이랄 것이 없는 나날들 속에서 마주하는 이런 작은 우연들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듦에 기분이 좋아지는 저녁이다.


'보고 싶다'

친구와 연인을 가리지 않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설레어하는 단어이다. 누군가의 그리움을 받는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 누군가의 그리움에 더하여 나 또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소중한 감정일까.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나는,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보고 싶다는 말을 더 애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을 볼 때 특히 더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곤 한다. 이를테면 구름과 하늘, 바다와 별 같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볼 때,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맛에 놀라던 짧은 찰나에, 평범했던 일상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을 때 등 말이다. 그럴 때엔 유독 누군가의 눈을 보며, 혹은 둘 사이의 공기를 데우는 무언가를 천천히 느끼며 온전히 감상하고 싶어 진다.


2020년, 뜨거웠던 여름의 공기가 차츰 그 온도를 내려가던 날에 이 글을 적게 되었던 건 밤새워 그리던 그리움에 더욱 보고 싶어 졌던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은 글이다. 물론 그 누군가는 지금도 여전히 보고 싶어 하며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지만 말이다. 2020년의 여름밤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선선해진 저녁 공기를 데웠다면, 2023년의 우리는 추워지는 공기만큼이나 살짝은 그 온도와 생기를 잃은 것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이 스쳤다.


지난 8월은 정말 다양한 감정을 겪었다. 짧지만 굵게 치는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렸다 몰려오는 그리움과 사무침, 그 뒤를 따르는 외로움과 헛헛함까지. 우리는 짧은 이별을 했고, 한 달의 그리움과 하루의 눈물을 얻었다.


기분 나쁜 직감 같은 것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시간들과 이별해 혼자가 될 것만 같다는 불안함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더욱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있었다.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일과 속에서 '보고 싶다'라는 단어는 원인을 모르는 통증처럼 자꾸만 툭툭 튀어나왔다. 이상하게 그를 당장 내 눈앞에 두고 봐야지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질 것만 같은 약간의 압박감까지도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그리움은 급기야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되어 나를 아프게 만들었다.


요 근래 하늘이 유독 예뻤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었던 그가 아른거렸던 여름이었다. 8월의 여름은 마치 오늘이 지구라는 별의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눈이 부시도록 붉은 하늘을, 불쑥 하늘 위에 커다란 무지개를 선물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것들은 더욱 또렷하게 한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짧은 이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새벽


우리는 짧은 이별을 했다. 짧든 길든 이별이라는 단어는 더딘 시간마저 곱절로 만드는 마법을 갖고 있음을 느꼈다. 서로의 슬픔을 알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알아봐 주고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 수 없는 헛헛함이 되어 눈물로 새어 나왔다.


서로의 힘듦을 질 수 없을 거라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그의 말을 들었다. 항상 행복해?라고 물으며 나를 웃게 하던 그 입에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배로 슬펐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슬픔은 꼭 서로가 짊어지지 않아도, 나의 슬픔을 나누고 또 숨겨도 그저 그 감정을 살펴봐주고 곁에서 숨을 함께 나누면 그것이면 되는 문제라 생각했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서로의 슬픔을 알아봐 주려, 안아주려, 노력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의 슬픔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을 묻지 않았었고, 그 또한 나의 슬픔을 어떻게 낫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답은 '노력'이었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서로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라도 해보자고.


하지만 끝내 내가 들은 답은 이별이었다. 서로를 보내지 못했지만 보내야만 하는 갈림길 속에서 우리는 밤새 울었다. 서로를 그리던 밤공기가 한순간에 세월에 묻혀 찰나의 기억이 될까 무서웠다. 길고 느린 새벽을 보내는 동안 나는 무한한 보고픔을 느꼈다. 다시 품에 안겨 조잘조잘 떠들어대고만 싶었던 새벽이었다.


얼만큼 그런 보고픔을 느껴야 괜찮아질지 가늠도 되지 않던 다음날 이른 아침, 그는 어제의 판단에 미안하다며 나의 뜻에 동의했다. 그때서야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적어도 나는, 이제는 정말 함께라면 무슨 아픔이든 딛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에게 서로가 소중하다면 구석진 아픔에 빛이 들 수 있게 창을 내는 노력이 필요했다.


보고싶다는 말로는 부족했던 8월의 새벽이었다. 나는 그가 내 곁에 있기에 언제든 맘껏 그리워할 수 있었고, 보고싶어 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저녁만큼은 당신을 그리워 할 누군가를. 또, 당신이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선선해진 저녁을 따스하게 데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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