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체 위에 무덤처럼 눈이 쌓인 아침이다.
대지에 파릇파릇했을 생명들이 지하에 씨앗을 숨기고, 허공에 흩날리는 하얀 눈발은 심해의 공기 방울처럼 고고했다. 지상과 심해를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찍은 듯한 적막은, 소름 끼치는 고요함마저 바닷속을 닮았다. 림은 두툼한 목폴라 스웨터를 입고, 폴라를 위로 길게 펼쳐 콧등을 가렸다. 지난밤부터 내린 폭설은 그칠 기미가 없이, 창밖에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선 머리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인 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 열흘 째 이어진 폭설로 인해, 거리에는 눈을 치우기 위한 상인들의 손길로 분주합니다…….
그 목소리 때문인지, 림은 목폴라 위에 길쭉하고 두꺼운 검은 털목도리를 목에 칭칭 감았다.
폭설이 나리는 출근길은, 여느 출근날과 다르지 않았다. 새벽 내 이미 제설 작업을 끝낸 노면 위는 젖어 있었고, 사람들은 찰박찰박 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림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모자가 달린 코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장갑을 끼고, 작은 세 사람이 거뜬하게 들어갈 만한 넓은 우산을 쓰고 걸어가기도 했다. 림은 눈이 쌓인 속눈썹과 이마를 닦아내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이렇게 날씨가 궂은날이면 림은 절대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상담센터까지 걸어서 30분. 이런 날은 버스를 타도 30분이 걸렸다. 훈김 가득한 만원 버스, 폭설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DJ의 목소리, 눈발에 젖은 신발이 버스 바닥에 밀착되며 들리는 소리, 멀미를 삼키며 눈을 감은 사람들의 표정….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만원 버스에서 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어깨너머로 울려 퍼지는 새빨갛고 쭈뼛 선 파동들. 사람들의 한숨과 답답한 히터, 그들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짜증 섞인 감정들을, 오롯이 림 혼자 목도해야만 했다. 이런 날 만원 버스를 탄다는 것은 림에게 고역스러운 순간이었다. 30분이 30년처럼 느껴졌다. 눈앞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림의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될 것만 같았다. 이 한겨울에 선글라스를 끼고 버스에 앉아 가는 것도 우스울 일이었다. 게다가 눈길 위를 달리는 버스는 거북이 속력으로 가니, 림이 차라리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편이 나았다.
길거리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파동은 흰 물결로 잔잔했다. 외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만 같았다. 가끔 붉은 파동과 푸른 파동이 보일 때가 있기도 했지만, 온동 핏빛으로 물든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림은 수많은 이의 반짝이는 파동보다, 단 한 사람의 파동을 좋아했다. 너울너울 퍼지는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멍을 때리며 힐링을 한다던 사람들의 말도 반쯤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한 타인의 물결에 대한 관심은, 림이 혐오하는 인간을 좀 더 너그럽게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 사람은 웃으면서 통화하고는 있지만, 파동은 붉네. 분명 직장상사랑 통화하고 있는 걸 거야. 정말 저 사람을 싫어하나 보네.'
한 사람에게 울려 퍼지는 파동을 보고, 림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공감할 수 있었다.
*
감정의 파동을 읽을 줄 알았던 림은,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빠른 아이라고 불렸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란 이유였다.
림이 한 인간의 본성을 파동을 깨닫기 전까지, 그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 전까지, 아이러니하게 림은 인간이란 존재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릴 적 림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늘, 윤슬에 반짝이며 흐르는 맑은 강물이 파동을 일으키며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의 없이 평안하고, 불평불만 없이,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그런 세계.
가슴속에는 모두 선한 천사만을 품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림은,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마냥,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활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괴로운 마음을 안고 있을 때면, 그 마음을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림의 능력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 줄 때 반짝이며 발현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가 짝사랑하는 선배의 마음을 읽어,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채줄 수 있었다. 친구들은 림의 말에 움직였고, 이제 연애와 관련된 일은 림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남자친구와 싸우고 울고 있는 친구에게도, 그런 친구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친구의 진짜 감정도 림은 볼 수 있었다.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진짜 진심들. 사랑과 혐오, 분노와 비참함이 어우러진 빛깔들을.
림이 자신의 능력을 혐오하게 된 날은, 인간에 대한 림의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던 열여덟 살 즈음이었다.
"림, 나 J를 좋아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림의 학급 친구인 K가 림을 찾아왔다. 여기서 K와 J, 모두 여고생이었다. K는 자신의 얼굴만 한 안경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J는 K의 오랜 단짝이라고 했다. 림은 모든 학급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했지만, 특정한 단짝은 없었다. 림의 눈엔 모든 친구들이 다 선하게 보였기에, K의 상담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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