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마켓 <The village markets>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어른이 되고나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원래 자주 볼수록 더 정든다고, 꽃꽂이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괜히 더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꽃을, 어느 때엔 간간히 선물 받기도 했고, 그러다 내가 직접 다듬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까지. 그 거리감이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어쩐지 그것들이 꼭 내 것이 된 것 같아 더 좋아졌다.
꽃꽂이 수업을 들을 땐 꼭 꽃만 다뤘던 건 아니고 가끔은 화분에 담긴 큰 식물들을 만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나는 꽃이 더 좋았다. 그 이유는, 꽃은 어차피 지기 때문이었다. 초록 초록한 식물들은 내가 집으로 데려와놓고 막상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으면 시들시들거리다 죽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컸는데, 꽃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꽃다발 속 꽃은 어차피 일주일 이내로 시든다는 걸(나 때문에 진 게 아니다). 그건 나에게 더 적은 죄책감과 더 적은 책임감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꽃꽂이를 한다는 건 우리 집 거실 탁자에 새로운 꽃이 올라온다는 뜻이었고, 우리 집 베란다엔 이미 시들어버린 꽃다발이나 센터피스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어디서 '시든 꽃은 집에 두는 게 아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직접 엄마 손으로 내가 가져온 꽃들을 버린 적이 없었다. 내가 가끔 특별한 날 선물과 함께 꽃을 집에 사가도, 꽃은 뭐하러 샀냐는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꽃꽂이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됐고, 나는 그 습관들 덕분인지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서도 로컬 꽃가게는 꼭 한 번씩 눈여겨보고 들여다보게 됐다. 호주에서도 꽃을 가까이에 두고 사는 문화 덕인지 길거리에서 종종 예쁜 꽃가게들을 볼 수 있던 건 물론이고, 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생화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근데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만약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그럼 나처럼 꽃꽂이를 하는 사람은 집에 꽃들이 엄청나게 쌓여가겠지? 아마 첫 고백 때 주었던 꽃다발을 몇십 년간 보살피면서 두고두고 시들지 않은 채로 바라보며 추억할 수도 있을 거고, 어쩌면 사람들이 굳이 새 꽃을 살 필요가 없어져서 꽃가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식탁 위엔 사시사철 같은 꽃만 올려져 있을지도.
꽃이 영영 시들지 않으면 좋아할 사람도 많겠지만 더 이상 선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꽃이 그렇게 소중한 이유는 언젠간 (아마도 조만간) 시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니까.
생각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프로포즈 장면에는 꼭 꽃과 반지가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꽃과 반지가 상징하는 것들은 좀 상반된 느낌이다. 꽃은 현재와 감정을 상징한다면, 반지는 미래와 책임감(결속)을 대표하는 느낌. 어쩌면 프로포즈는 당신과 '지금부터 미래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제안이니까 꽃과 반지가 필수 준비물이 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뜨거운 마음도 언젠가는 사그라들고, 때로는 수많은 약속들도 슬쩍 없던 일들이 되어가지만, 그렇다 해서 그 마음과 약속들이 가치 없는 일들이 되는 게 아니듯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비슷한 이치인 것 같다. 사시사철 날이 뜨거워도 좀 무서울 거 같기도 하고, 매일 똑같은 꽃만 피어있어도 좀 질릴 것 같기도 하고, 매일 죽을 것처럼 사랑해도 좀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늘 제일 싱숭생숭해하는 시기가 계절이 바뀌어가는 때이니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뭔가가 피고 지는 것들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시든다고 괜히 미워하지 말고, 너무 아쉬워하지도 말고, 미리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자. 대신 충실하게.
말은 이렇게 해두고, 이 날 주말 마켓 <더 빌리지 마켓>에서 꽃이 아닌 목걸이를 두 개나 사긴 했지만.
목걸이도 예쁜 걸 어떡해.
그게 꽃이든 반지든 목걸이든, 물건으로 마음을 묶어둘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아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지는 밤.
열심히 살고 싶다.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