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ah Dec 22. 2020

#40 지나고 보니 우린 다 추억을 만드는 중

올해 얻은 나의 태도들

한 해가 저물어가려고 하는 12월. 확실히 연말임을 느끼는 게, 그동안 자주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요즘 엄청 연락이 와서 놀랍다.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었는데, 계기와 원인이 무엇이었든 상관없이 이 시간만큼은 나 스스로에게 많이 집중하고 싶었기에 그 변화를 일일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사람 심리라는 게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궁금해져서인지 여기저기서 내 근황을 묻는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던 한 해였다.

대다수의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외로울 때도 많았지만, 이 시간들만큼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처음으로 나만 생각할 수 있어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해방감을 잔뜩 느꼈던 시간들.


해가 바뀌려고 하는 연말이 되면 괜히 한 번 올해는 어떤 시간이었는지 정리해보고 싶어져서, 브리즈번에서 내가 좋아했던 차분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갔다. 이래서 연말은 좋은 것 같다. 모든 일에 데드라인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챕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욱더 기대하게 만든다.





#1 집

2018년에 시드니 호텔에서 받은 요가매트는 내 최애템.



호주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일단 여기선 사람들이 하루를 새벽부터 쓰기 때문에 (카페도 새벽 6시 30분에 열고 오후 3시면 거의 닫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굉장히 빨라서 나도 덩달아 하루를 빨리 시작하고 빨리 닫았기 때문이다. 일단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지배해서 밤늦게까지 깨어있더라도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곳이기 때문에 매번 집을 고를 때마다 나의 최우선 순위는 '마음이 편안한 곳'이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걸 보면 나의 직관을 믿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방청소하고, 세탁기 돌리는 등 집안일을 하는 것부터 노래 듣기, 사진 정리하기, 책 읽기, 창밖 구경하기, 영화보기, 글쓰기, 커피 내리기 등 소소하게 움직이다 보면 말 그대로 평화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가끔 멍하니 스툴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면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그게 좋았다. 마치 내 안에 쌓여있는 독이 빠져나가는 그런 느낌. 핸드폰을 거치대 위에 두면 충전되는 것처럼 그 스툴도 앉으면 저절로 충전이 되는 힐링 스팟이었던 듯하다. 집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그 안에 이런 장소를 마련해주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히나 볕이 잘 드는 자리에.



#2 요가 스튜디오

요가 스튜디오 Soba 뒷마당에서 먹는 아침식사.

   

브리즈번에서 제일 많이 드나들었던 곳 Soba studio.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클래스 시간대가 폭넓은 덕분에 매일매일 내 몸상태나 컨디션에 맞춰서 원하는 수업을 들었다. 가끔은 아침 일찍 요가를, 저녁엔 스트레치 수업을 듣느라 하루 두 번씩 가기도. 매일 가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고, 요가 끝나고 뒷마당에서 마실 커피 생각에 60분 내내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시간도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기쁨은 밤 8시쯤 듣는 야외 요가 수업이었는데,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잔디밭에서 풀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매트에 몸을 눕히면 천장에 빨랫줄처럼 걸쳐놓은 전구들이 별같이 빛나서 꼭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태도가 자세로 드러나게 되어있는데, '내가 잘났다,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할수록 일어서서 고개를 치켜든다고 한다. 반면 '뜻대로 하십시오'하고 수용하고 수긍할수록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다고. 예전에 요가 자세는 다 기도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들었다. Soba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주어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금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법을 조금씩 몸으로 배운 것 같다.


무엇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같은 시간 속에서 행복해하는 게 느껴져서 덩달아 행복해졌던 시간 그리고 공간이었다. (물론 필라테스 시간엔 양손에 1킬로씩 들고 60분 내내 움직이느라 포기자 속출이었음) 같은 공간 속에서 숨을 나누면 행복한 기운도 자연스레 퍼진다. 슬픈 마음들은 누그러지고.



#3 장보기

Aldi 마트 앞엔 장보기 전에 개를 묶어두는 공간이 있다. 강아지들 모임 장소.


요가 스튜디오 바로 옆에 Aldi 대형 마트가 있어서 매일매일 운동 끝나고 장을 봤다. 마트에서 현지 제품들을 볼 때마다 '진짜 호주 와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괜히 즐거웠던 시간. 마음 같아서는 온갖 초콜릿, 아이스크림, 과자, 시리얼을 종류별로 전부 다 맛보고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처음 호주 왔을 때 이미 몸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라 신선한 음식들만 골라 골라 사 먹었다. 더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를 알아보는 법 같은 건 1도 모르지만 괜히 앞에 서서 고민하는 시간도 즐거웠다. 


가끔 지루해질 때쯤 새로운 음식도 시도해보고 안 사보던 재료도 사보다 보면 성공하는 때도, 실패하는 때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즐거워서 상관없었다. 반복적인 일상도 공을 들여 하나씩 하다 보면 다 의미가 생기고 몰입하게 된다는 걸 이때 많이 배웠다.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인 것 같아도 공을 들이다 보면 은근히 다 다른 날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요리를 하면 실컷 2시간 준비해놓고 거의 10분 만에 음식이 사라지니까 그만큼 허무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과정이 즐거우면 대체로 결과도 의미 있어진다.



#4 미술관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서늘함과 냄새가 있다. 밖이 아무리 더워도 반팔로는 둘러볼 수 없는 서늘함. 그래서 항상 미술관에 가는 날에는 가디건을 챙겨 다니는데, 이상하게 그 느낌이 좋았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밖에서 전쟁 나도 미술관 안은 평화롭고 안전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이 있다. 그림이나 미술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니어도 그 안전한 느낌이 좋아서 나는 어느 도시에서든 한 번은 미술관을 가보는 걸 추천한다.


그중에서도 퀸즐랜드 아트 갤러리는 브리즈번 강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뷰도 좋고, 무엇보다 건물 바깥에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아늑한 느낌이었다. 서늘함 속에서 평화롭게 안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오면 이런 장소가 나온다.

갤러리 외부 카페


햇빛이 등 뒤로 따뜻하게 내리쬐는 야외. 가끔 정말 정말 고요하게 보내고 싶을 때,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의 조용한 순간이 그리울 때 여기 오면 좋다. 대체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조용히 신문을 보고 있거나, 소곤소곤 대화 나누는 사람들이 전부다. 그야말로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기 싫은 날 오기 딱 좋은 곳. 예전에 드라마에서 '혼자 같이 있자'라고 말하면서 묵묵하게 옆에 앉아있던 씬이 있었는데 그거랑 비슷하다. 


햇살이 강해서 자외선 차단제는 꼭 발라줘야 하지만, 이렇게 햇빛이 비추는 곳에 한참 앉아서 멍 때리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진다. 오늘도 평화로운 브리즈번.



#5 사진

필름 카메라 한 통 다 썼다.


예전엔 사진을 참 많이 안 찍었다. 사진으로 남겨두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게 더 정직하다 생각했고, 정작 직접 보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순간에 카메라를 꺼내느라 그 순간을 놓치거나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근데 호주에 온 이후로는 워낙 시간이 많고 여유롭게 다니다 보니 혼자 사진을 많이 찍었고, 또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잠들기 전에 30분 정도 틈내서 정리하면서 사진으로 일기를 쓰는 느낌. 처음에는 사진을 찍기만 하다가, 그다음엔 사진을 정리하거나 편집하기 시작했고, 또 그다음으로는 사진에 캡션을 달아두거나 글씨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까 뭔가 마음속에 빈 구석이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더라.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 많이 쌓일수록 그 날 하루도 더 행복해진다는 걸 이 소소한 행동들을 통해서 알게 됐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매일 기록해둔다. 기쁜 날엔 기뻐서, 슬픈 날엔 슬퍼서, 성취하면 성취한 대로, 좌절하면 좌절스러운대로. 가끔 시간 날 때 되돌아보면 그땐 진짜 세상 로또 맞은 것처럼 행운이라 여겼던 일이 나중에 보니 절대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큰 실수였던 적도 있고, 그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좋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일도 많았다. 그러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마운 일이라 여기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할 것. 모든 것들을 상처로 남기지 말고 경험으로 바꿀 것. 사진 일기를 쓰면서 이런 것들을 배웠다. 



좋은 순간들을 허락해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작가의 이전글 #39 지켜보고 싶은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