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4
어제는 로즈라는 동네에서 백패커스 동생들을 만났다. 로즈에도 한국인들이 꽤 살아서인지 한식당들이 있다. 우리는 그중 코리안차이니스 레스토랑, 그러니까 중국집에 갔다.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한국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한국의 지방에서 자란 나는 유린기를 먹어볼 기회가 많이 없었다. 몇 번 안 먹어본 유린기지만 그중에 이곳 유린기가 정말 으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요즘 꾸미고 있는 작전들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여러 약속을 받아냈다. 내 비밀 연구의 공동 연구자 들인 셈이다. 친구들과는 공원에 앉아, 일하면서 생긴 회포를 풀었다. 노동자로 산다는 건 한국에서나 호주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쌓인 감정들이 많다.
어제는 혼자 있을만한 공간이 필요해서 에어비앤비를 잡았다. 노스 시드니라는 처음 가보는 동네다. 시티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있는 곳이다. 집들은 정갈하게 줄지어 있고, 반듯하게 정돈된 가로수 너머로 페리들과 요트들이 둥둥 떠다닌다.
분명 직전까지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는데, 말도 안 되게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마음 안에 뭔가 끌어 오르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주디가 헤어지기 전에 혼자 있을 때는 즐거움을 모르겠다는 지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언니, 혼자 지낼 때의 자유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나는 바깥에 에너지를 맡겨놔서 그걸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가끔은 정말 내 몸이 어떤 에너지를 흠뻑 흡수해서 내가 가득 채워진 기분이 든다. 나는 혼자서 바깥에 있을 때 가장 큰 비율로 세상이 주는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에어비앤비 집을 찾는데도 헤매고, 집 안에 들어가는데도 집주인의 설명이 조금 달라서 헤맸다. 집주인은 연락이 잘 안 된다. 모르겠다. 어차피 당장 뾰족한 해결법이 없다면 그냥 이곳을 즐기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저리도 파란데 울상을 짓고 있을 이유가 없다.
에어비앤비 안에는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내가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온 가족이 수영복 바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새에 씻고 저녁 레스토랑 예약이 잡혀 있다며 후다닥 나갔다. 다음 날에도 일찍 집을 비운 탓에 집주인과 얘기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냥 정말 방만 빌려 잘 자고 왔다.
집안 곳곳에 이런 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살라, 지상에서 천국에 있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웃어라, 듣는 이 없는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것처럼
꿈꾸라, 불가능이란 없는 것처럼
경기하라, 이기는 자 없는 것처럼
주어라, 네가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웃어라, 얼굴이 아플 때까지
아껴라, 너의 가족과 친구들을 매일같이
도서관이 문 여는 시간 전에 동네 구경을 더 마치고 갈 작정으로 약간은 일찍 집에서 나왔다. 이런 뷰조차 너무 좋다며 감탄을 했다. 시드니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서 한참을 걸었다. 완벽한 일요일 아침이다.
내가 사랑하는 건 푸름과 파랑, 평화, 예술 그리고 자유라 하더라.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가진 이 도시는 세계적인 미항이다. 그 덕에 버리고 싶은 마음만 들던 내 미운 전공을 살리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드니는 페리가 트레인과 같은 교통수단이다. 역마다 갱웨이를 바삐 설치하는 크루들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몰라 같은 이상한 운명론에 휩싸이고 만다.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20대의 전부를 제식문화 아래에서 살았다. 내가 관통해 온 대학교와 직장 모두 경직적이고 엄격했다. 이 자유를, 알아채지 못해도 순간 턱끝까지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는 이 자유를 사랑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
도서관이 문을 열기 전 옆에 놓인 작은 카페에서 피콜로 라떼 한잔을 시켰다. 난 지금 이 순간에 곧바로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굳이 미래가 되지 않아도 이 순간이 그리울 거란 걸 알아채고 말았다.
결국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만 하고 있을 미래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계속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살아온 어느 시점에 그렇게만 살다가 자주 과거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봐서 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또 도서관에 찾아온 거다. 근데 요즘은 내가 쫓아가는 미래가 지금보다 미약하면 어쩌지 하는 조그만 걱정이 된다.
이렇게 자유롭게 떠돌면서 살아가면 어떨까? 혼자라면 유린기를 먹지 못할 때가 많겠지만 당분간 혼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한국에 있는 사랑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이상하게 어디론가 끌려가는 기분이 든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게 깊게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모르겠다. 어디까지 빠져버린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