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08
해변 여행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여행의 마지막 도착지였던 쿠지 비치에 왔다. 여름바다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힘이 대단한지, 홀리데이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그득그득하다.
저 먼바다 수평선 위에 Will you merry me 글자가 동동 떠다닌다. 오늘은 어느 한 커플에게 잊지 못할 날이 될 건가 보다.
이 풍경은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마치 물에 젖은 빨래처럼 바위 위에 널어져 있다. 바위만 있으면 다 등을 대고, 배를 깔고 눕는다.
심지어는 커다란 바위 틈새에도 사람들이 자주 들어가 있다. 이 모습을 저번 여행 때 처음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마치 제집인양 사람들이 들어가 있다. 저번 홀리데이는 바위틈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도 한 번 앉아보고 싶었는데 내게 허락된 틈이 없었을 정도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어 바위 위 한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 바다와 해변이 보이는 명당이다. 지난번에 해를 하도 많이 맞았더니 이마와 콧등이 새까맣게 타서 오늘은 양산을 준비했다. 양산 아래서 행복하게 노래를 들으며 누워서 편지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편지에 "여기에 어떻게 존재할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라는 말을 적고 있었는데 저 멀리 커플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움켜 잡고, 결국 저렇게 등을 지고 앉았다. 어떤 커플에게는 기쁜 오늘이었는데, 어떤 커플에게는 오늘이 최악일지도 모른다.
쿠지 비치에서 조금 더 걷다 보니 Coastal Walk는 끝났다. 해변은 계속 이어지지만 산책로는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주택가를 따라 계속 걸었고 해변을 만났다.
나는 복세복살을 이 큐브에 비유하곤 한다. 사실 세상살이는 이 큐브와도 같을지 모른다. 큐브는 복잡하긴 해도 풀어내는 규칙이 있다. 그걸 배우는 게 어렵긴 해도 배우고 나면 큐브를 풀 수 있다. 분명하게 맞출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배우는 과정이 어려워 포기하는 게 다수다. 나도 아직은 큐브를 맞추진 못한다. 하지만 오늘 이 큐브를 보며 또 생각한다. 나는 정말 저 큐브를 풀기 위해 이 세상에 왔구나. 그러면 내가 꼭 풀고 말겠구나 하고.
나는 오늘 호주의 광활한 자연에 눈이 멀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는 역시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지금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진다. 가끔 극한의 비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은 시시하고, 이곳은 입이 딱 벌어지게 멋있다고. 이런 곳을 두고 닭장 같은 한국에서 태어난 스스로가 불쌍할 정도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토미에게 홀리데이가 어땠는지 물으니 토미는 "여기 해변은 다 거기서 거기야. 매번 비슷하지 뭐. 그 어느 해변에 아주 큰 클럽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 대단했어." 이런 평을 남긴다.
나는 타성이 두렵다. 꿈꾸며 바랐던 것들도 손아귀에 들어오면 부서진다. 내 손안에 당연한 것들의 존재감이 어떻지? 이미 가질대로 가져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면 꽝이다. 한동안 꽝인 삶을 살았다. 무얼 뽑아도 자꾸 꽝인 것만 같았다. 대단한 것도 일상이 되고 삶의 일부가 되면 대단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 멋진 자연이 그저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어진다.
나는 그런 꽝 인생을 견디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꽝이 아닌 걸 얻고 싶어서 선택한 호주워킹홀리데이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반대 방향의 교훈들을 많이 얻고 있다. 꽝도 꽝 나름대로 낭만이 있다. 꽝을 얻은 것도 제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오늘 책을 읽다가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소피에게 배운 것들에 대해 글로 적어야겠다. 그걸 책으로 엮어야겠다. 글은 계속 쓰고 있었지만 책으로 낼만한 글 거리는 도저히 없었다. 나 같은 애가 꿈에도 그려보지 못했던 작가를 이런 방식으로 이뤄야겠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 꿈 또한 내게 사소해질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나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으니까. 생전 행복해서 울어본 적이 없던 내가 자꾸 웃다가도 울음을 참기 어려워졌으니까.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인생이 꺾여가는 걸 보면서 벌어진 입을 숨기려 한참을 틀어막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