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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훈 Oct 24. 2021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파사르가대'를 가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파사르가대Pasargadae'를 가다     



위대한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창건         



(파사르가대 앞 키루스 대왕의 후예들)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파사르가대>, 키루스 2세가 그 기초를 닦았으며 기원전 546년이나 아니면 그 이후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 <페르시아>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이름은 시라즈가 있는 <파르스>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의미이다

1935년 팔레비 왕조가 이란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까지 옛 이름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다. “열려라 참께‘ 알리바바의 주문이 금방이라도 들여올 듯하고, 신밧드가 양탄자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듯하다. 그 화려했던 과거를 되뇌이면 다시 한 번 번성할 그 날을 기다리며, 페르시아인들은 그 이름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을까. 

그 역사적 이름을 뒤로하고 팔레비 왕조는 자신들의 새로운 도약의 의지를 담아, ‘아리안 민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이란으로 바꿨다. 그리고 미국과 가까이 지내며 너무 급진적인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를 일삼다 민심을 잃었다. 

또한 너무 세속적으로 치닫다 보니 이슬람계 보수파 성직자들로부터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급기야 1979년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란·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왕조는 붕괴되고 신정제를 확립한다. 그리고 시아파가 정치를 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서고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된다.          


(이란인의 자존심, 페르세폴리스 제국)     


역사를 따라가 보면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이란 북서부에 있었던 고대국가 <메디아>에서 출발한다. 구약성서 다니엘서에는 <메대>로 불린다. 

<키루스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과 병합되기 전까지 이란의 첫 번째 국가를 형성한 셈이다. 기원전 55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가 나타났으며, 그 ‘기원전’에 벌써 민주주의 이룬 듯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인 ‘키루스 원통’이 1879년에 발견된다. ,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고,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들에게는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놀라운 안목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에 이렇게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온화한 성군이 나타날 수 있었다니.’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며, 다리우스 1세 때는 최고의 광활한 국토를 가지게 되는데, 인더스강에서 유럽에까지 이른다.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차지한 셈이다. 

이후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그리스와 격돌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낸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세계사에 걸출한 전쟁 영웅으로 미화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 대왕이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렇게 쉽게 큰 땅을 복속할 수 있었던 대왕은 상당히 영리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듯하다. 스스로 자신을 페르시아의 계승자라고 일컬으며 다리우스 3세의 장엄한 장례식을 해주고, 그의 딸 스타데이라와 결혼했다.      


부숴진 제국의 영화가 덧없다.


226년에는 사산 왕조가 나타나며 유럽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427년 동안이나 영위하던 왕조는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암살을 당하면서, 그의 아들과 많은 유민들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것으로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사라지고 조로아스터교도 쇠퇴했으면 지금은 야즈드나 봄베이 등에서만 간신히 그 명맥이 이어져간다.      

650년에 나타난 <이슬람 제국>은 그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다. 

그러나 북동쪽에 있던 셀주크 투르크족에 침입하여 이슬람 제국이 흔들리게 된다. 1037년에는 셀주크 제국이 탄생 되지만, 1194년 마지막 술탄이 죽으면서 25년간 공백기가 된다, 그 후 1219년부터 259년간이나 그 땅에서 지속되는 <몽골제국 점령시대>로 들어간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정복의 싸움이며 전쟁의 광기로 점철된다. 한 대(代)만 지나가도 서로 뺏고 뺏기는 그 땅에 대한 욕심들은, 왜 그리 끊이지 않았을까, 단지 정복야욕만 가득 찬 한 사람을 위해서,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이나 떠가는 구름, 

철조망 사이를 지나가도 걸리지 않은 바람을 바라본 정복자는 없을 듯하다."     


    

(이제 촌로들만 사는 이란의 옛 마을‘아비안느’)     


이후 등장한 사파비 왕조(1507~1722)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가장 큰 시아파의 나라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이란이 시아파로 이어지게 한다. 이후 수많은 왕조들의 분열기를 거쳐 1925년 팔레비가 왕조를 건국한다.      


조로아스터Zoroaster(짜라투스트라)교의 발상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만다라)     


이란은 고대 종교이자 인류 최초의 종교라고 알려진 짜라투스트라교의 발상지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조로아스터이지만 페르시아어로는 짜라투스트라다.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고 하여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일신교(一神敎)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는 세계를 창조한 <아후라 마즈다>의 예언자를 자처하며 진리를 전파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가 하면 권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들 공동체 중 유명한 것이 파르시Parsi, Parsee다. 파르시는 ‘페르시아 사람들’, 혹은 ‘그들이 쓰는 언어’, 즉 페르시안Persian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탄생한 시라즈의 파르스 지역과 이름이 닮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나 통치 이데올로기 등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 교리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言), 바른 행동(正行)’ 이니 바로 우리가 수천 년 배워왔던 유교의 전통이지 않는가. 그러니 그 뒤에 태어난 세계의 종교들은 모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티벳의 조장(鳥葬)이나 기독교, 불교의 선사상 등도 가만 살펴보면 비슷한 점들이 많다.  


https://youtu.be/3epki8NAbWg


그리고 대담하게 ‘신은 죽었다’를 외치면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삶은 이야기 하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던 니체도, 70~80년대 세계의 록음악을 풍미했던 영국의 유명한 밴드인 <퀸Queen>의 대표주자 <프레디 며큐리>의 아버지와 가족도, 이 종교에 심취한 파르시 공동체 일원이었다. 

니체 여동생의 지지 아래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다른 민족들은 하위인간으로 보고 만행을 저지른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나찌의 표상과 불교의 만(卍), 십자가도 다 짜라스트라교의 지, 수, 화, 풍(地水火風)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도 지수화풍(四大)은 삶속에 깊이 뿌리내려 너무나 익숙하지 않는가. 

제국의 가장 번성기인 다리우스 대왕 때는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렇게 모든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화려했던 종교가, 지금은 왜 완전히 쇠퇴하여 소수의 사람들만 믿고 있는지 참 의문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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