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임을 인정하고 비로소 깨닫게 된
2021년이 저무는 시점이었다. 돌아보면 1월 한 해의 시작부터 내가 기대하고 예측하고 바랐던 많은 것들이 어그러진 일 년이었다. 평생 병과 함께 하게 된 신세,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 삶.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환자인 나를 인정하면서 하나 둘, 믿음으로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과 수많은 훈련을 해온 지난날들이었다.
상상과 너무나 다른 연말을 보내게 됐지만 그렇다고 기쁘고 감사한 순간이 하나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프고 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삶 속 감사를 느끼고 생각하게 됐다고나 할까. 날 걱정해 주고 늘 함께해 주는 가족이 감사했고, 우리 집 고양이가 시도 때도 없이 귀여워서 감사했고, 매일 바다를 볼 수 있음이 감사했고, 그 바다가 아름다워서 감사했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 다정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음이 감사했고, 먹고 싶은 게 있고 또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일상이 내게 영감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감사했고… 그렇게 감사한 것들을 생각하니 더욱 기쁘고 감사한 날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특별히 감사한 게 있었는데, 바로 내가 계속 무언가 만들어내는(표출하는) 걸 꾸준히 원하고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병 때문에 여건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붙여가며 끊임없이 창작하는 걸 소망하고, 다짐하고, 어떻게든 시도라도 해보려는 모습을 발견하니 그 스스로가 참 새롭게 느껴졌다. 창작 욕구와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끈질길 줄은 몰랐다. 환자임을 인정하면서야 비로소 이 마음의 크기를 알게 된 것이다.
대단하게 눈에 띄는 생각이 있다거나 능력이 있는 게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창작하는 삶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이 문득 신기했다. 더불어 내 안에 창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해 놀라웠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움을 넘어선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나만의 답을 만들고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어렵고 때때로 두렵기도 하지만, 그 일들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즐거움과 행복감이 두려움보다도 더 크니까. 아무튼 이 모든 것을 이르자면 창조를 향한 이끌림과 사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게는 이렇게 상황에 무너지지 않고 한없이 이끌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설레는 일인가!
앎은 사랑이고 사랑은 삶이다. 전에 그런 삶을 원한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삶이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나를, 사람을, 세상과 창조주를 많이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그렇게 깊고 넓어진 삶으로 살고 싶다고 다시 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창조는 그런 삶에서 흘러나올 테니.
그나저나 앎과 사랑과 삶이란 것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지구가 이 자리를 지나고 또 지날 때까지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감사히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느리더라도 행복하게. 언제나 겸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