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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06. 2023

아이에게

사실은 아이였던 나에게 하는 말

아픈 팔목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물리치료실의 열린 창문 밖에서 선선한 바람과 함께 어떤 아이의 서럽게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뭐라고 웅얼대며 우는지, 우는 아이를 향해 엄마는 뭐라고 말하는지 4층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울음소리를 듣는 내가 다 서러울 정도로 서럽게 운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울까. 궁금이 일 정도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어느 시점에, 뜬금없이 감은 눈앞으로 내가 어릴 때— 아마도 우는 그 아이와 비슷한 나이쯤 살던 서울 동네의 모습이 펼쳐졌다. 보통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표현할 텐데 생각의 떠오름이 아니라 꿈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왜 이 풍경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특별히 보이는 건 학교 가는 길이었다. 횡단보도가 많아서 가는 방법에 따라 적게는 3개, 많게는 5개까지 건너야 했던 추억의 등굣길. 그중에서도 초등학생인 어린 내가 혼자 걷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한없이 길게 느껴지던 ‘대왕 횡단보도’가 보였다.


그 이미지 위에 어떤 기억이 겹쳤다.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난 몇 년 후, 오랜만에 혼자서 옛 살던 동네를 찾은 기억이었다. 혼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멀리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난 호기심으로 추억을 더듬으며 몇 년 전에 등교하던 그 길을 똑같이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왕 횡단보도를 마주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내 눈에는 너무 크고 길고 거대해서 한 8차선 도로쯤으로 체감했던 횡단보도였다. 하지만 몇 년 후 다시 보니 횡단보도는 실제로 그 절반, 4차선 도로밖에 되지 않는 아주 보통의 것이었다. 분명 이쪽에서 부지런하게 바쁜 걸음으로 걸어야 저쪽에 닿을 수 있다고 느낀 머나먼 길이었는데, 느낀 것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짧다는 사실은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대왕인 줄 알았던 횡단보도는 사실 대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믿기든 믿기지 않든 횡단보도의 빨간 불은 파란 불로 바뀌었고 나는 건너가야만 했다. 발걸음을 떼었다. 예전처럼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순식간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도착하는 나였다. 이상했다.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허무함 같기도 하고 깨달음이 있을 때 드는 느낌 같기도 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건 세상의 크기가 뒤바뀌는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물리치료가 끝났다는 알람이 울렸다.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듯, 아이의 울음소리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어느샌가 고요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사건으로부터 멀어진 후에 천천히 헤아렸다. 어린 나로서는 감당하기 벅차다고 느꼈던 것, 그렇지만 내색 않고 감내했던 것, 매일 반복하며 무뎌진 것, 되돌아 마주해 알게 된— 내가 느꼈던 만큼 현실이 무섭거나 겁먹을 것은 아니었다는 진실, 생각보다 세상은 크지 않고 나는 작지 않다는 사실, 성장 혹은 변화, 마지막으로 얼굴도 이름도 모를 어떤 아이가 서럽게 울어서 내가 잊고 지낸 옛 풍경을 다시 본 이유를.


그 아이는 왜 울었던 걸까. 어떻게 울음을 멈추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저 가만히 상상해 볼 뿐이다.


지금 네가 마주한 상황과 마음이 너무도 버겁게 느껴지겠지만 나중엔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아니, 네가 울었던 걸 기억도 못 할 만큼 기쁨이 찾아올 때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충분히 눈물을 흘려보내고 그만큼 다시 씩씩하게 나아가자고, 괜찮다고, 그 흔적이 네 영혼을 특별히 빛나게 할거라고. 서럽고 따가운 울음소리만 남기고 간 아이의 빈자리엔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해주고픈 마음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뒷모습에 표정이 있다면 | Someone Has an Expression on the Back,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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