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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08. 2023

예술이 하고 싶어

스물여덟, 드디어 마주한 나의 마음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렇게 삶이 멈추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을 변명 삼아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미뤄뒀던 내가, 이제는 다른 일에 곁눈질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 ‘그것’과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스물여덟, 나는 드디어 ‘예술이 하고 싶다’는 마음과 마주했다.








2020년, 한창 졸업 작품을 진행하던 초가을 무렵 한 친구가 내게 원하는 게 있냐(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간단하지만 참 복잡한 질문이었다. 차차 다가오는 졸업을 앞두고 미래가 고민됐지만 정작 무엇을 하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 직장을 다니는 것 등 웬만한 것들은 다 괜찮은 선택지 같아 보였다. 결국 질문을 받은 그 자리에서는 답하기 어려워 잘 모르겠다며 넘겼더랬다. 어떤 길이든 좋을 거라는 마음에, 나는 그저 적절한 때에 내가 가야 할 하나의 문이 열리기를 잠자코 기다리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스스로 덮어둔 가장 깊고 솔직한 마음은 ‘예술이 하고 싶다’였다. 하지만 내가 예술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자격부터 현실적인 금전 문제, 무엇보다도 예술이 과연 세상에 소용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그 고민들 앞에 분명한 답이 없던 나는 선뜻 예술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 작가가 된다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저 먼 꿈처럼 여기고 있었다. 당장 마주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웠다고나 할까.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충분히 있었고 인생은 기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하게 될 거라고, 일단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며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랬던 나는 졸업 후 환자가 되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마저 힘들어진 이 상황을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대 중후반의 나이, ‘앞길이 구만 리’라고들 하는데 이제 막 졸업한 내게 그 앞길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나아가는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을 보며 조바심이 났고 이 몸으로는 더 이상 일이든 뭐든 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부질없이 욕심을 냈다. 그러니 더더욱 태연하게 예술이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게는 당장 할 수 없게 된, 아니, 평생 할 수 없을지도 모를 다른 것들이 더 크고 다급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환자였다. 다른 이들이 평범하게 사는 삶처럼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품다가, 평생 이러지는 않을 거라고 근거 없는 부정도 하다가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내 상태를 납득했다. 직장을 다니는 것,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것, 사회생활은 일절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내 상태를 인정하는 순간. 미련을 두고 억지로 붙잡고 있던 모든 문들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딱, 하나 빼고.








딱 하나, 내게 남은 유일하게 열린 문. 그 문은 예술이었다. 모든 문이 빛도 새지 않을 만큼 꽉 닫혔을 때 이 문만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들이 다 닫히고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이 문을 제대로 보게 됐다. 언젠가 먼 훗날에 도달하게 될 거라 생각했던 문. 삶이 나를 밀고 밀어서, 생각지도 못한 때 이 앞에 서게 되었기에 이 문이 열려 있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삶이 완전히 멈추어서 다른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되자 순수하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문으로 가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창조를 향한 나의 마음, 더 구체적으로는 예술하는 삶을 말이다. 다른 이유를 변명 삼아 피해왔던 진심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예술을 하게 될 때 마주할 현실과 고민이 부담스러워 이리저리 다른 곳을 기웃거리며 예술의 길을 계속 미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원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마침 나는 아팠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때 예술은 유일하게 열린 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그것만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갈 수 없게 된 길에 대한 아쉬움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 모든 상황은 결국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고 오롯이 ‘여기’,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 예술을 하는 게 나의 현실이 됨으로써 내가 늘 부담으로 지니고 있던 예술에 대한 자격이나 고민들이 의외로 단숨에 일단락되었다. 예술할 자격 따위를 논하는 건 예술만이 유일한 내 현실 앞에 무의미했다. 또 쉽게, 배가 불러서 예술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에서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내겐 더더욱 이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니까. 몰린 형국처럼 보여도 이 현실이 내게 나아갈 힘과 용기를 주었다. 예술이야말로 내게 정말 기회였다.


한편 이 상황이 되어서야 깨닫게 됐다. 크고 무겁게만 여겼던 예술이 실은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삶이 거창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정말 다양하고 수많은 이유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듯 그렇게 예술은 탄생하는 거였다. 또한 거창하지 않다고 해서 예술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삶이 의미 없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로 수긍하게 됐다. 누군가 의미 없다고 비웃어도 내게 의미가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한 존재에게 의미가 있다면, 단 한 존재만이라도 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예술을 바라왔던 난 아무래도 예술이 돈의 논리나 어떤 자격이 주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아야 했던 것 같다. 또 개인적으로는 예술을 마음에 품은 이상 예술을 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절박한 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이 모든 게 아프면서, 예술이라는 문을 분명히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가장 어둡고 답이 없는 순간이었는데 이 순간을 넘어서자 놀랍게도 내 안에 복잡하게 엉켜있던 것들이 조금씩 풀리면서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에두르거나 얼버무린 표현이 아닌 ‘예술이 하고 싶다’고, ‘예술을 하겠다’고 똑똑히 내뱉을 수 있다. 어렵게 돌고 돌아서 예술하고픈 마음을 인정한 셈이다. 무엇보다 내 상황을 마주하고 이곳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았기에 결심한 그 순간에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기쁘고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내게 열린 하나의 문, 예술. 아득한 꿈처럼 멀고 큰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렵게 생각했던 만큼 소중하고 신중하게 여겼다는 반증으로 삼고 싶다. 앞으로 평생에 내가 공부하고 고민하고 알아가고 표현하는 모든 것을 예술을 위한 동사로 삼으며,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감사하며, 흔들리더라도 언제든 다시 즐거이 작품에 임할 수 있기를.




예술을 좋아한다면 예술을 해 보십시오.

예술을 생각할 때 내가 하는 생각은,
오히려 그것이 유별난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약을 봉지에 담거나,
덧셈을 하거나, 투자계획을 세우거나,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일 수 있읍니다.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이재에 밝은 사람이 있고
승부에 강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학교 은사이신 교수님께 그간의 고민과 선택을 알려드렸더니 길고 다정한 답장을 주셨다. 그중 유독 내 마음을 다독인 문장들을 여기 적는다.


아, 나는 예술이 하고 싶다. 예술을 하며 살 것이다.








파도 II | Waves II,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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