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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햇살 Aug 28. 2023

날씬해 보이려고 평생 검은옷만 입었는데

나는 옅은 색깔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항상 그랬지만, 요즘 정말 입을 옷이 없다. 20년 넘게 직장생활했는데도 입을 옷이 없으니, 도대체 입을 옷이 있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최근 더 더 옷이 없는 기분이 드는 까닭은, 작년에 본사로 발령이 나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아져서 그런것 같다. 몇년간 홈쇼핑에서 파는 세트를 구입해 돌려입어 왔는데, 홈쇼핑 이외에 옷에 눈을 돌리려고 하니 막막하기도 하고 옷 쇼핑에 돈과 시간과 수고를 쓰는것도 좀 아까웠다. 그런 와중에 옷장을 열면 입을 옷이 마땅찮고 옷을 사도 시원찮았고 이러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동안 나 스스로의 스타일에 대해 잘 모른 채로 옷이 없다는 탓만 했던 것 같다.







  얼마 전의 일이다. 새로 산 살구색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는데,  충동 구매하고 후회했지만 미처 반품을 못한 옷이었다. 대부분의 내 옷은 검정색 계열인 데 비해 이 블라우스는 색깔이 많이 화사했다. 곧 '당근'에 내놓을 예정었고, 그 전에 한 번 입어라도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살구색 블라우스에 대해 주변에서 의외로 좋은 반응이었다. 내 옷 중 '탑 5' 안에는 분명히 들 거라는 평을 들었다. 주로 입어왔던 짙은색에 비해 얼굴이 확실히 살아 보인다며 절대 '당근'에 내놓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의외로 부해보이지 않고 약간 어려보이는 느낌이 들어 여름 내내 몇 번이나 교복처럼 잘 입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옷을 화사하게 입어야 하나..?






  얼마 전에 퍼스널 컬러를 진단받을 기회가 생겼다. 나는 평생 내가 '겨울 쿨 톤' 이라고 믿고 살았다. 겨울 쿨 톤은 검정이 잘 어울리고, 선명하고 과감한 색상도 잘 맞는다. 거기에 몸집이 큰 편이기도 해서 항상 검은색 위주의 짙은색 옷을 입었다. 조금이라도 슬림해 보이고 싶었고, 나이도 직급도 있는 처지이니 선명한 색상을 입어야 좀더 품격과 무게감이 있어 보일 것 같았다.


겨울 쿨은 이런 느낌. 네이버 검색

..이런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진단 결과, 의외로 나의 퍼스널컬러는 '여름 쿨 톤'이고, 그 중에서도 '여름 쿨 라이트' 라고 했다. 여러 명도와 채도의 색상지를 얼굴 밑에 직접 대어 보고 진단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틀린 진단이 아니었다. 


  '여름 쿨 라이트' 는 기본적으로 흰색과 흰색에 가까운 색상이 어울린단다. 따라서 옅은 색, 파스텔톤이 적합하고 짙은 색, 강렬한 무늬, 그리고 카키 계열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이나 머리도 최대한 자연스럽고 은은한 것이 좋고, 눈도 입술도 은은한 핑크 톤이 어울린다. 한마디로 화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인듯하다.




출처 네이버




"그래도 검은색 옷을 입는게 날씬해 보이니 더 낫지 않은가요?"


"검은색은 가장 기본이라 안 입을 수는 없죠. 하지만 '여름 쿨 라이트'가 너무 진한 색상 옷을 입으면, 옷에만 눈이 가고 정작 사람에 눈이 가지 않아 인물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여요.


님이 가장 생기있어 보이는 색깔은 흰색에 가까운 하늘색 혹은 연한 핑크색이네요."




  와, 이십 년을 출근하며 매일 아침 옷을 고르면서 내게 어울리는 색이 뭔지도 몰랐구나. 항상 어울리지 않는 옷들을 사고 맞지 않는 스타일을 입어 오면서 '옷이 없다'고 생각했던 다. 살이 쪄가는 내 몸을 탓하고 마음에 들지않는 옷을 탓하고, 얇은 지갑을 탓하고 수납할 공간이 부족해 보이는 옷장을 탓하면서 말이다. 문제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닐까.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옷을 구입하니 아무리 옷을 사도 마땅치 않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을 모르고 살아온 어울리는 옷 색깔처럼, 오랜시간 확신을 가지고 믿어왔던 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안 어울려서 싼 값으로 중고 거래에 내놓으려고 했던 옷이 실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탑 5'에 들 수도 있듯이. '겨울 쿨 브라이트'라고 믿어온 내가 '여름 쿨 라이트'일 수도 있다는 거다.


  나에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매사 뚜껑을 열어보고 오픈해서 들여다봐야 확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세상 모든 일의 이치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여름 쿨 라이트'인 내게 딱 들어맞는다는 옅은 하늘색 원피스를 큰맘먹고 구입해 입어 보았다. 화사해 보인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내어 올 여름에 여러 번 꺼내 입었다. 옷장에서 오래된 검은 옷들을 처분하고, 옅은색 블라우스를 장만했다.


  그런데 간절기가 다가오니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여름에는 퍼스널컬러를 통해 찰떡궁합 옷을 찾아냈는데, 가을을 바라보니 입을 옷이 또 없다. 더구나 가을옷은 카키, 브라운, 황토, 벽돌색 등 무드있는 짙은색의 향연인데 이것이야말로 '여름 쿨 라이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깔들이기 때문이다. 퍼스널컬러 진단을 받은 결과 이번 가을에는 정말 입을 옷이 없으니 옷장을 비우고 또다시 옷을 장만해야 한다. 이럴바에는 그냥 만고의 기본이라는 검은 색으로 돌아가는게 속 편할 것도 같다.






  사족. 머릿속에 자체 빅픽처를 갖고 큰 일을 하는 잡스와 저커버그. '여름 쿨 라이트'냐 '겨울 쿨 트루'냐 사소한 문제로 골치아프지 않도록 그들의 옷장은 무채색 티셔츠로 가득하다.  나도 본받아 볼까, 입을 옷도 없는데. 물론 색깔은 옅은색으로 바꿔서. 나는 여름 쿨 라이트니까.


커버그의 옷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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