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사랑의 기술』을 읽고 쓰다
독서량과 어휘력은 정비례 관계인가. 이 당연해 보이던 명제가 요즘들어 의문스럽다. 일종의 직업병인지, 나는 내가 의미를 장악하지 못한 단어의 사용을 극도로 꺼린다. 주워듣는 단어의 수는 개구리 알처럼 증식하건만, 정작 내가 꺼내 쓸 수 있는 어휘의 연장통은 나이가 먹을수록 홀쭉해 진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사랑의 기술』이다. 난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모른다고 생각하므로 되도록 발음하거나 끄적이지 않은 채 살아왔다. 다만 세상에서 말해지는 사랑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인스타그램과 K-드라마들에선 온갖 것들에 대한 사랑과 추앙이 넘쳐나는 듯 보였다. 사랑을 되도록 발음하지 않는 나와, 빈번히 사랑을 입에 담는 세상과의 소통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다른 단어로 지칭해도 괜찮았다는 뜻이다. 다르게 불러도 상관없는 것들이 사랑이 맞는가. 아니면 사랑으로 부를 수 없는 것들을 함부로 사랑이라 부르는 시대일까. 손 털고 다른데 좌판 차린지 오래인 한때 철학도에겐 버거운 질문이다.
어릴 땐 ‘내 인생은 000 아니었으면 끝났을 것’이라는 형식의 문장을 자주 말하고 다녔다. 장담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을 쉽게 장담하던 청춘이었다. ‘000’ 칸의 세입자는 자주 바뀌었는데, 언젠가는 책, 언제는 애인, 또 언젠가는 노래였다. 그러나 종종 삶은 ‘000’이 공실일 때조차 어찌저찌 지속됐다. 삶이란 생각보다 질긴 것이로구나, 한 뼘 철이 든 나는 어쩐지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과거 한 인터뷰를 준비하다 온갖 종류의 자살 사례를 찾아본 적이 있다. 보통의 투신 자살자들이 실행 전 신발과 안경,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책에서 “최소한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미치거나 자살하고, 희망이라고는 없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가 된다”는 문장을 읽으며 멈칫한 이유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이, 삶의 마지막 흔적이 될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정돈하는가. 대부분의 삶은 질긴 것이되, 어떤 죽음들은 그보다 끈질겼다. 그때즈음엔 왜인지 겸허해진 나였다.
두터운 고목의 나이테 중심부는 수분 및 영양소 교류가 끊긴 일종의 무기물 상태라고 했다. 무생물에 가까운 상태로 나이테 안에 굳어버린 고목의 일부분이 전체의 중량을 지탱한다. 나 역시 삶에서 만난 ‘사랑’보단 내 나이테 중심부, ‘무기물’의 견고함을 신뢰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다. 그 많던 사랑과, 우정, 신뢰도 살아 꽃피는 것들의 본분대로 기어이 꺾여 낙화했다. 이따금 내 나이테 안엔 남은 게 없다고 믿어질 때, 그 중심부엔 무너지지 않는 뭔가가 남았다고 생각하면 힘이 났다. 그리고 이 무기물은, 나이테 바깥쪽 젊은 피부가 왕성하게 생장하며 생채기들을 극복해 갈수록 그 두께와 견고함을 더해갈 것이었다. 돌고돌아 결국 ‘삶’인 것이다.
다만 그 삶에서 사랑의 설자리가 어디인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내 나이테 속 겸허한 기둥은 아직 질기고 견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