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 슬픔의 재발견

by 시언

처음 <인사이드 아웃>이란 영화 얘기를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작년 여름, 새벽까지 이어진 어느 술자리에서 였다. 나보다 3살이나 많은 누나가 극장에서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돈 내고 극장에서 본 것도 신기한데, 그걸 보고 우는 사람이 있다니. 과연 세상은 넓고 인간군상도 다양하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갔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선입견과 일말의 조소는 <인사이드 아웃>을 한번 본 후 말끔히 사라졌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당시 100여명 규모의 <인사이드 아웃> 상영관에서 가장 서럽게 운 사람이 바로 나였다면 대답이 될까. (쉼없는 훌쩍거림에 영화관람을 방해받으셨을 당시 같은 상영관 관람객분들께 진심 어린 사죄를...) 영화관에서 울어보기는 난생 처음이라 나 자신도 많이 당황스러웠다.


<인사이드 아웃>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라일리'라는 십대 소녀의 머릿속에 있는 5명(?)의 감정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주인공들의 이름은 '기쁨이,' 슬픔이', '까칠이', '소심이', '버럭이'로, 모든 인간들에게 내재된 핵심감정을 상징한다. 그 중에서도 극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두 가지 감정은 바로 '기쁨'과 '슬픔'이다.


기쁨은 슬픔이란 감정의 존재이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하지 않는다. 기쁨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라일리의 행복'이고 행복은 오로지 웃는 것, 즉 기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슬픔은 라일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장애물일 뿐이므로 기쁨이는 아예 분필로 원 하나를 그린 후 슬픔이에게 '거기서 나오지 않는 것이 너의 최선'이라 해맑게 말한다. 하지만 삶이 그렇하듯, 슬픔은 자꾸만 비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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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영화 속 기쁨이만의 바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될 수록 적은 슬픔을 느끼고 싶어한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슬픔이란 감정을 없애렸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정말 슬픔은 적을수록, 기쁨은 많을수록 좋은걸까?


누군가와 공감을 통해 감정을 공유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부모님, 친구, 연인 등등... 공감의 기억들을 가장 생생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가장 첫번째에 오는 기억은 기쁨을 공유할 때였을까, 슬픔을 공유했을 때였을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은분 나의 슬픔을 남이 알아주고 그 슬픔을 공유했던 기억을 더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사실 기쁘고 행복할 때는 타인이 그리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 지금 상태로도 날아갈 것처럼 행복한 이에게 타인은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닥 상관없는 존재이기 쉽다. 게다가 타인들 역시 누군가의 기쁨을 축복하는 데 뜨뜻미지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타인들의 성정이 못되먹어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기쁨은 이유가 다 고만고만 하기 때문이다. 취업, 대학 합격, 연애, 결혼 등...


하지만 슬픔(불행)은 다르다. 슬픔은 좀 더 개별적인 실존적 감정이다. 크고 작은 실수에서 오는 절망감, 부상, 꿈의 좌절, 형제처럼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회적 계층 불평등에서 오는 서러움까지. 이 지구상에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 갯수만큼이나 다양한 슬픔들이 존재하며 이 슬픔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다원적이고 개별적이다. 이러한 슬픔의 개별성으로 인해 개인은 슬픈의 한가운데에서, 절실하게 타인을 필요로 한다. 세상 전체가 빛을 잃어버린듯한 이 슬픔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을.


정신의학적으로 봤을 때, 매순간 기쁨만을 느끼는 사람은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건강한 정신이란 슬픔, 기쁨, 좌절,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을 적시적소에 온당하게 느끼는 것이다. 연인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단 한번의 실수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고 퇴보했을 때, 노력해온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조차 애써 웃으며 '긍정의 힘'을 외치는 건, 거대한 슬픔에 대한 회피반응일 뿐이다.


작품 후반에서 결국 기쁨은 슬픔이 가지는 고유한 기능을 꺠닫고 받아들인다. 그 순간, 사춘기를 맞아 파국으로 치닫던 라일리 역시 슬픔과 공감의 힘으로 한 치 성장하면서 작품은 끝난다.


삶이 기쁨만으로 충만했다면 우리가 지금 아는 대부분의 예술은 시작조차 못했을 거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인간의 문명이란 것 자체가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슬픔을 대변하기 위해 발명된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적절히 승화될 수만 있다면, 슬픔은 기쁨보다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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