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얀센 백신, 소위 "민방위 백신"이라고 불리는 백신이다. 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백신을 맞고 나서 보면 '참, 그땐 그랬지' 하고 웃으며 지나갈 법한 쓸데없는 기록일지도 모르겠지만.
단톡방에 백신 접종 예약 링크가 올라왔을 때만 해도 사실 별로 급하게 맞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타이타닉 호에서 노약자에게 구명보트를 양보했던 신사의 마음...이라기 보다는 아무튼 급할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예약했다는 사진을 하나씩 올리니까 나도 왠지 유행에 합류하고 싶어져서 바로 예약을 했다.
IT 강국답게 신청 페이지의 모바일 UI가 굉장히 깔끔하고 훌륭했다. 신청 병원 목록에는 소아과부터 이비인후과, 내과 등등 동네 병원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모두들 고생하고 계시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소아과로 총총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기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아빠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한쪽엔 코로나 백신을 맞으러 온 용맹한 - 그리고 조금 우중충한 - 민방위 대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쪼로록 앉았다. 아이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끝에서부터 한 명씩 일어나 자리를 양보해주는 모습이 굉장히 질서정연했다.
내 차례가 왔다.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몇 가지를 물어본 뒤, 주의사항을 설명해주고 나서 직접 주사를 놔줬다. 의사 선생님이 놔주는 주사는 처음인 것 같은데, 역시 이렇게 친절해야 소아과 선생님을 하는가보군요. 주사는 생각보다 묵직하게 꾸욱 누르는 기분이었다. 독감 백신을 맞은지도 꽤 됐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느낌. 주사를 맞고 나서 이상이 없는지 20분 정도 기다렸다 귀가하라고 했다.
내 다음 다음 차례로 진료를 받은 너댓살 정도 되는 꼬마숙녀가, 진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만세를 부르며 "아, 다 나았다!" 라고 활기차게 외치는 걸 보고서, 좋아 나도 이젠 코로나 따위 두렵지 않다 - 라는 기분으로, 물론 마스크를 잘 쓰고 귀가했다. 아참, 나는 뽀로로 밴드를 붙여주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물론 그걸 노리고 소아과로 신청한 것은 아니지만. 진짜로요.
돌아오는 길에 맥도날들에 들러 BTS 세트와 햄버거 하나를 사왔다. 요즘 유행하는 백신을 맞았으니, 요즘 유행하는 BTS 세트를 먹어야지 - 하고 별 생각없이 매장에 들어갔다가 생각보다 BTS 세트를 주문한 인파가 많아 한참을 기다렸다. 직접 BTS 세트를 사러온 민방위 대원을 보는 카운터 직원 분의 표정은 뭔가 복잡해보였지만... 정말 모두들 고생하고 계시는군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봐야지 - 하는 생각이 꼭 나쁜 것 같지는 않다. 백신 접종률을 올리기 위한 캠페인이 만약에 필요해진다면, 배우 두세명이 나와서 "어, 너도 맞았어?", "야 나도 맞았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 카메라를 보며 "너도 맞았어?" 이렇게 물어보는 구성이라면... 너무 90년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광고 같군요. 그냥 BTS 멤버들이 백신 접종 확인증을 흔드는 사진 한 장이면 될 것 같다. 요즘 접종률이 빠르게 올라가는 걸 보면 굳이 이런 캠페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지만.
BTS 세트는 BTS 멤버들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성한 세트랄까. 치킨 너겟과 감자튀김, 그리고 특제 소스와 콜라로 구성된 간단한 메뉴다. 바쁜 스케줄로 이동하면서 빠르게 요기를 하기 위한 구성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나는 바쁜 스케줄이 없기 때문에 불고기 버거를 하나 더 사서 배불리 먹었다.
아무튼 백신을 잘 맞았고, BTS 세트도 맛있게 먹었고, 그 뒤로 사흘 간 누워있었습니다. 아플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타이레놀을 챙겨먹을 걸 그랬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