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와서 쉬고 있다. 어느덧 두 달 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좀 '글을 써볼까' 하는 사람다운 컨디션으로 올라왔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하늘은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오후. 선선한 테라스 카페에 앉아서, 크로아상과 아이스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아, 이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사실 대단할 건 없다. 그냥 즐거운 잡담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태에 불과한데, 그게 잘 안될 정도로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을 때가 있다. 사람들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고, 별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요?
그보다 조금 더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이야기를 '읽을' 수도 없어진다. 나는 보통 잠들기 전에 방금 막 올라온 웹툰을 한두 편 보고 자는데,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는 그조차도 귀찮아진다. 그럴 땐 마치 연료가 다 되서 길에 퍼져버린 자동차 같다.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럴 때는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잘 쉬는 게 제일이다. "맛있는 것 드시고, 잘 자고, 운동하고,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면... 아마도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꼭 하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훌훌 버리고 떠났다.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어느 곳에 갈 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지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백수, 해야할 일이 하나도 없는 상태. To-do list를 달고 다니던 게 버릇이 되서, 너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니 좀 불안해서 처음에는 한의원, 헬스장, 세탁소, 이런 식으로 할 일을 적어놓고 며칠을 보냈는데, 좀 익숙해진 뒤로는 그것도 다 내려놨다.
다행히 며칠을 쉬자 '아무 것도 읽고 싶지 않은 상태'는 벗어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로 빠르게 호전되지 않았다. 조바심이 들었다. 이만큼 쉬었으니까 노트북을 펴면 무슨 글이라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글이 문장이 되지 않았고, 문장이 서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막 좌절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노는데 아무렴 어때. 뭐 천천히 괜찮아지겠지.
올해 5월은 매주 한 번씩 비가 내렸다. 몇 주간 비가 내리고, 다시 해가 나고,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햇볕이 조금 더 뜨거워졌고, 우리 동네 나무들은 여름빛으로 무성해졌다. 나뭇잎이 푸르게 자라나듯이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좀 자라난 것 같다. 뭐 그렇다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글을 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