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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Jul 13. 2019

아빠가 암일지 모른다

네 아빠 보험금 받을 그런 복이나 있겠냐, 내가.


아빠가 또 죽겠다고 집을 나갔던 날. 

그래, 차라리 죽으라 그래, 보험금 받아서 빚이라도 갚게 죽으라 그래. 다시 돌아올 땐 시체라는 아빠의 문자에 내가 벌컥 화를 내자, 엄마는 오히려 담담히 답했다. 너희 엄마에게 남편 사망 보험금 생길 복이나 있겠니. 엄마의 말에는 일말의 비관도 한 치의 낙관도 없었다. 더 이상은 남편에게 그 어떤 작은 기대도 긁어모을 수 없는 아내의 말. 그는 말처럼 쉽게 죽지 않을 것이고, 어느 날부터 정신을 차려 새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지리 복도 없지, 골라도 이런 남자를. 둘의 관계엔 자조만 남아 엄마는 더 화를 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엄마의 말대로 아빠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달, “폐암”이라는 글자가 적힌 정기 검진 결과서가 아빠 앞으로 날아왔다. 그 두 글자를 보자마자, 3년 전에 엄마와 나눴던 그 대화가 떠올랐다. 아빠의 마지막 자살 소동이 있던 그날의 대화가.


왜 아프다니까 자꾸 좋은 기억이 생각나냐.


의사의 소견을 듣고 온 날, 엄마가 말했다.


CT로는 폐암 2기 같고요, 기관지도 상태가 안 좋아요.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입원을 위해서는 또 검사가 필요했다. 

아빠는 채혈을 하러 가고, 엄마와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엄마 눈가에 아이라인이 번져있었다. 


엄마, 울었어?


엄마가 대답했다.


눈물이 조금 나더라고. 아프다니까. 


왜 일상엔 선명한 악역이 없을까. 


아빠를, 

나는 덮어놓고 미워하고 싶다. 그렇게 죽고 싶어 했으니 잘 됐다, 이제 죽겠구나, 대놓고 고소해하고 싶다. 하지만 그를 악당으로 여기기에 내겐 너무 많은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목격해 온 것이다. 아직 30대인 그가 트랙터를 새로 샀던 날을, 40대인 그가 두 딸을 데리고 자전거 여행을 갔던 날을. 딸의 과학 실험을 위해 개울의 물고기를 종류별로 잡아오던 그를, 검은쌀밥 못 먹는 둘째 딸을 위해 옆 식당에서 공깃밥을 꾸어온 그를, 나는 모두 알고 있다. 그 기억들이 온갖 미움 속에서도 말간 얼굴로 죄 없이 반짝이며 놓여있다. 


내가 태어나자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어버렸던, 그가 폐암이란 정보를 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실패한 부부. 존경 없는 가장. 이룬 성취도 없고, 실현한 의지도 없다. 기껏 속마음도 술을 마셔야만 말할 수 있는 관계. 평생 누구를 이해해보지도, 이해된 적도 없는 사람. 그의 인생은 무엇을 남겼을까. 한 소년이 태어났고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보았지만 제대로 되지 못했다.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형태의 결말로 인생이 마무리 되려 한다. 정말 암이어서, 곧 죽는다면 그래도 아빠는 옳다, 죽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길가메시여, 품 안의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라 했지만 아빠에겐 그 본인에게 진절머리 난 아내와 자식들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품은 텅 비어있는데.


저 나무가 다 내가 심은 건데, 이제 동네에 나무밖에 안 보이네. 


주말에 간 시골집. 강 건너에서, 이제는 남의 집이 되어 버린 옛 우리 집을 바라보며 아빠가 말했다. 집을 둘러싼 미루나무와 떡갈나무들. 길 건너의 자두나무와 앵두나무, 살구나무들. 엄마와 아빠의 신혼집이었고, 어린 아빠가 자랐으며 또 내가 자라난 곳. 가꾸는 손길 없이도, 누가 심은 지 모르는 사람들 곁에서도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자랐다. 아빠는 최소한 이 나무들을 남겼구나. 그가 남긴 것 중 이 나무들이 가장 확실한 것들이다. 새끼 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뻗으며, 계속해서 자라날 것이다. 


이 달 말에 그는 수술을 받는다. 밤마다 아빠는 여전히 코를 골며 잔다. 몇 해 전 시체 운운하던 그가, 이렇게 건강한데 암이겠냐며 코를 곤다. 그 코골이 소리에 몰래 숨어 울다 나는 질문을 고쳐 쓴다. 어떻게 죽어가야 할까. 어떻게 죽으면 그래 이제는 정말 죽어도 돼 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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