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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시 감별사 Oct 29. 2022

한옥 게스트하우스 호스트가 되다

3-4 안동 한옥에서 살아본 이야기 

안동이 내게 준 가장 큰 자산은 ‘한옥’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안동 어디에서든 한옥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시내 중심가에도 오래된 한옥이 매우 많다. 기회가 되면 한옥이란 한옥은 다 구경하고 다녔다. 고택에도 일부러 머물렀고 방문이 가능한 곳이면 각 문중의 종택, 종가집을 방문해보기도 했다. 퇴계의 고장이기도 한 안동에는 각종 문중의 종택과 종가집이 많다. 


한옥의 아름다움에만 눈을 뜬 것이 아니라 한옥을 소유하고픈 욕심까지 들게 했다. 당시 6개월 살이를 하던 경주를 떠나기 전에는 매물로 나온 한옥집을 여러 곳을 구경 다니기도 했다. 주머니엔 돈도 없었으면서!      


돈은 둘째 치고 아니 한옥이라니! 한옥은 부지런한 종가집 맏며느리들만 소유하고 가꿀 수 있는 집이 아니었던가. 서울의 아파트에 살면서 그나마 얼마 안되는 집안일 하기도 매우 귀찮아하고 힘들어 하는 게으른 내가 과연 한옥을 가꾼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이나 하는 걸까. 한옥에 대한 욕심이 커질수록 이런 양가감정도 깊어만 졌다. 가지고 싶었지만 한옥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나 소유할 욕심을 부려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그해 가을 사무실을 이전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창업을 한 이후 서울 시내 한복판 아는 분 사무실을 공유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사무실을 옮겨야 했다. 이전하려는 사무실 위치가 내가 살던 집과는 너무도 반대편이었기에 동행을 포기하고 나만의 사무실을 알아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옥을 사무실로 구하면 어떨까 싶었다. 일단 시세라도 확인해보자고 서촌을 갔다. 그러나 당시(2012년 가을)에도 서촌조차 매매 가격은 내 상황에 감당이 안되는 금액(지금에 비하면 엄청 저렴하다)이었고 임대는 매물조차 별로 없었다. 


우연히 대학로 한 극단에서 사무실 공유 문의를 낸 것을 보고 혜화로터리 부근을 찾았다. 위치도, 가격도 적당해서 바로 입주하기로 계약을 했다. 그런데 어랏, 그 주변에 한옥이 많다. 북촌이나 서촌처럼 한옥이 많이 모여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네 군데군데 한옥이 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냥 시세라도 물어보자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들어갔다가 두 세 곳의 한옥을 구경했다. 뛰는 가슴이 차분해지더니 왠지 한옥이 내 손에 곧 들어올 것 같았다. 


임대가격이 매우 적절한 한옥 하나에 마음이 갔다. 사무실로만 사용하기에는 조금 벅찬 가격이었다. 방 3개에 마루, 욕실 겸 화장실 2개가 있는 아담한 도시형 한옥이었는데 큰 방만 사무실로 쓰고 작은 방 2곳은 게스트하우스나 쉐어공간으로 운영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운영 경험은 당시로선 전무했다. 취재를 위해 경주, 안동 등을 다니면서 눈여겨 보아둔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음이 가면 직진해버리고 마는 내 성격으로선 계약하고 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서울 혜화동의 한옥 한 곳을 임대해 사무실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모험을 시작하게 됐다. 여행기자로 사회생활을 일하면서 막연히 나중에 은퇴를 하면 지방에 주택 하나를 구해 게스트하우스도 하고 지역 여행 투어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대에도 없던 서울에서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임대해서 입주한 지 2개월 만에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운영 첫해는 대 성공이었다. 여성 전용으로만 운영했던 것이 오히려 적중했던지 방 2개로 연 매출만 4천만원을 넘게 기록했다. 심지어 여름 2주간은 에어콘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 운영을 쉬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1년 만에 현타도 심하게 왔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서울을 방문한 여행자들과 여행 얘기도 나누며 즐거운 인연을 만들 기대에 부풀었으나 서울에 온 여행자들은 대부분 여유롭게 얘기 나누기 보다는 바쁘게 자기만의 볼일을 보기에 바빴다. 나 또한 게스트하우스 업무에 기존 하던 일까지 하려니 24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밤 늦게 처음 입실하는 게스트를 맞이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난 게스트의 입실을 확인한 후에야 집에 갈 수 있었으니 내 귀가는 늘 늦기만 했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더할 나위없이 힘들었다.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기려고 해도 방 2개는 무척 애매한 규모였다. 간혹 친정엄마와 청소하는 분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손님맞이는 늘 내 몫이었다. 첫해엔 매월 꼬박 꼬박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 또한 부담스러워 운영을 중단하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취재를 못가는 게 가장 힘들었다. 부업이 주업을 갉아 먹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게스트하우스 운영 2년 째는 좀 더 내려놓기로 했다. 단골이 많이 늘어 첫 입실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었다. 두 번째 방문한 게스트에게는 그저 대문 비밀번호만 톡으로 남겨두고 사용할 침대만 알려주면 되었으니까. 출장을 가야할 경우엔 새로 오는 게스트를 받지 않았다. 거기에 아는 후배도 힘을 보태주어 다른 일과 함께 게스트하우스 업무를 도와주시도 했다. 

 

3년차엔 주변에 게스트하우스나 숙소들이 많이 생겨 게스트들이 많이 줄었지만 단골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오픈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대학로엔 연극 뮤지컬을 좋아하는 꽤 많은 지방 덕후들이 주말마다 올라왔고 내가 운영하던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는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하룻밤 묵어가기 제격인 곳이었다. 그들은 토요일 지방에서 올라와 주말 내내 3-4개의 공연을 보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2018년 12월을 끝으로 임대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경험 삼아 운영해보기엔 긴 시간이었다. 게스트하우스까지 운영하며 쏟은 에너지로 2017년부터는 잠시 번아웃이 오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집에서 짐을 빼는 순간까지도 무척 아쉬워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공간에 애정을 쏟은 곳이었다. 


결혼한 이후에도 늘 전세살이를 하느라 집에는 굳이 애정을 쏟을 생각을 못하면서 살아왔다. 늘 이사를 다니면서도 정리정돈과 청소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가 있으니 그 마저도 잘 안되긴 했다. 그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처음으로 공간에 맞춤 가구를 놓고 게스트가 이용할 이부자리까지 직접 선택하며 관심을 기울인 곳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보다 물건 하나를 더 정성껏 골랐다. 


인생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서의 5년의 경험은 무엇을 가져다줄까. 그 경험이 좋은 자산이 되어주지 않을까. 뭐 아무렴 어떤가. 게스트하우스를 그만 둔지 만 4년이 지나고 있지만 난 그곳에서 만난 몇 명의 이들과는 여전히 연락을 하며 연극과 뮤지컬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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