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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시 감별사 Oct 29. 2022

소도시 노스탤지어

3-3 안동 아버지와 나 2) 

아버지에게 고향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해방 세대인 1945년생으로 한국 전쟁 후 전쟁에서 벗어나고 산업화를 초기를 이루던 세대이다. 열일곱에 진학 문제로 고향을 떠나오셨고 청년시절 서울에서의 삶도 그리 녹록지 만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한다. 가고 싶은 대학에 낙방하고 후기로 들어간 기독교 학교는 정붙이기 쉽지 않았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다니다 중퇴를 했다. 


아버지는 삶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큰 사람이었지만 운은 잘 따라주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도 자주 옮겼고 사업 시도도 여러 번 했다가 말아먹었다. 내가 아주 아기였을 때 경주에서 아버지가 안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당시 아버지는 울산의 H사를 다니셨다고 한다. 엄마랑 결혼할 때 그 회사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만 2년도 못다니고 그만두었다는데 유독 이 회사를 기억하는 건 이후 엄마가 삶을 토로할 때면 늘 ‘니네 아빠가 H사를 계속 다녔다면 내가 고생을 덜했을 텐데’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아버지와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던 엄마는 그 첫 번째 이유가 아버지 직장 때문이었다고).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 재기해 보려고 급여가 높다는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를 자처하기도 했다. 내가 8살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나가 만 3년 반 정도 근무하고 돌아오셨다. 다녀온 이후에도 사업을 했지만 그마저도 성과는 없었나 보다. 엄마의 푸념엔 H사에 이어 ‘사우디에서 모아온 돈으로 잠실에 작은 아파트라도 샀더라면’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내가 사춘기를 겪던 12-15세 사이가 가정형편이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방 3개 짜리 반지하 집을 전세로 구해 방 하나만을 다섯 식구가 사용하고 나머지 방 2개는 근처 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이들 하숙을 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나는 당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복닥한 집이 얼마나 싫었던지 늘 학교 주변을 싸돌아다니다 6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시커먼 아저씨들(지금 생각해보면 한창 20대인 젊은 총각)에게 아침, 저녁을 차려주던 그 분위기가 싫어 밥을 대충 먹고 나면 난 책을 꺼내들고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집에는 엄마가 얻어온 어린이문고, ooo 대백과 전집, △△△문학전집 등이 가득했는데 최소 5번씩은 반복해서 읽었던 것 같다. 


당시엔 부모님의 다툼도 잦았다. 아마도 돈 문제가 컸겠지. 다툼은 늘 집의 물건 몇 개가 부셔져야 끝이 났다. 아버지는 물건을 부수는 주사를 갖고 있었는데 분노가 어느 한계치에 이르면 물건 몇 개를 부순다. 장독대의 항아리는 남아있는 게 없을 정도였는데 다른 가구나 상 등은 본인이 부순 다음 날이면 말끔히 새것처럼 고치는 재주도 갖고 계셨다. 


그럴수록 난 그냥 내 세계에 빠져 지냈다. 한 방에 모여 복닥거리는 중에도 틈만 나며 책을 손에 들었다. 시험기간을 핑계로 공부하는 척을 했다. 열 서너살이던 내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책 읽고 공부하는 것 그리고 방학 때면 할아버지와 새 할머니 계시던 시골(친가는 의성을 떠나 강원도 정선으로 이전)과 울산과 거제 등 막내 고모집으로 도피하는 것 뿐이었다. 


집안 형편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나아졌다. 아버지는 오랜 친구가 운영하던 회사로 출근을 하셨는데 거기서 안정되면서 독립을 했다. 그때 사업은 비교적 잘되었던 것 같다. 3년 정도 운영하던 하숙도 그만두었고 곧 반지하가 아닌 집으로 이사도 했다. 이후 아버지의 사업은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내가 20대 후반까지 꾸준히 운영되었던 것 같다. 


삼 남매 모두가 한 때 대학을 다녔던 적이 있는데 그 학비를 부모님은 모두 감당하셨다. 난 대학에 들어간 후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내 용돈 벌이 정도였다. 학자금 융자를 한두 번 받은 것 외에는 등록금은 온전히 부모님이 해주셨다. 심지어 우리 삼 남매는 나를 제외하곤 대학도 여러 군데 다녔는데 그걸 다 감당하셨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존경스럽다. 물론 우리 삼 남매는 번갈아 군대도 가고 잠시 휴학도 하면서 속도조절을 하기도 했다. 나는 못했지만 동생들은 두 번 째 간 대학에서는 장학금을 타오기도 했다. 

부모님은 내가 스무살이 넘었을 때 드디어 살던 동네에서 작은 주택을 소유하셨다. 재래시장과 가까운 작은 단독 주택이다. 아버진 그 집에서 돌아가셨고 엄마는 지금도 그 집에 혼자 살고 계신다. 


경상도 출신의 보수적인 아버지셨지만 늘 현실 너머의 또 다른 이상을 꿈꾸신 듯 했다. 간혹 외롭기도 했지만 사우디에 계셨을 때가 정신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여유로웠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술 좋아하던 분이 무려 3년간 술도 못마시는 이슬람의 나라에 계셨다. 아버진 여가시간에 그동안 못하던 취미활동을 즐기셨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당시로서는 드문 공연장도 가끔 다녔으며 카메라를 사서 사진도 찍으셨다고 한다. 지금도 친정 집에는 아버지가 사온 클래식 음악 테이프가 작곡가별로 가지런히 있다. 이 테이프들은 음악 좋아하는 나와 남동생이 종종 꺼내서 듣곤 했다. 


필름카메라의 고전으로 꼽히는 니콘FM2와 스파이들이 주로 활용했다는 롤라이 카메라도 집에 있었다. 지금은 너무도 흔한 게 사진기이고 웬만한 카메라보다도 잘 찍히는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누구나 소유하고 있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 사진이 꽤 많은 데 아버진 틈만 나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산 사진기로 우리 삼남매를 많이 찍어주셨다. 우리 삼남매의 소풍, 운동회, 빙학, 입학과 졸업 등은 아버지의 단골 촬영아이템이었다. 

지금 그때의 사진을 보니 사진도 꽤 잘 찍으셨던 것 같다. 구도도 좋고 필카 만이 갖는 아련한 감성도 살아있다. 


니콘FM2는 이후 내 차지가 되었다. 여행기자가 되었을 때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전 그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배웠고 여러 출장길에 들고 다녔다. 니콘FM2는 지금도 버리지 않고 아버지 유품처럼 간직하고 있다. 


형편이 나아진 이후에는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지방 곳곳을 여행 다니기도 했다.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셔서 주말에는 새벽 일찍 엄마와 함께 자주 집을 나섰다. 그러던 분이 한창 중년생활을 영위할 나이인 59세 어느 여름 ‘루게릭(근위축성측상경화증)’ 진단을 받고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야 했으니 얼마나 본인 신세가 한탄스러우셨을까.  


근래에 좀 알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치병’ 진단을 받는 그 병은 소수만이 알고 있던 병이었다. 지금까지도 치료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감각과 정신은 일반인 이상으로 멀쩡한데 근육이 굳어지고 퇴화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병이다. 늘 자유를 꿈꿔오던 아버지는 한 평 침대에 갇힌 그 상황을 몹시도 못 견뎌 하셨다. 


간간이 나누던 대화마저 힘들어질 무렵 아버진 우리들을 붙들고 의성 얘기를 자주하셨다. 사실 건강하셨을 때는 가끔 의성에 다녀오시긴 했어도 우리에게 따로 고향 얘기를 하지 않으셨다. 본인의 삶이 길지 않았음을 직감하셨는지 우리가 동의하던 말던 의성의 한 야산에 묻혀 계시던 할머니 근처에 묻어달라고도 하셨다. 


그러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아버지는 이승의 생을 마감하셨다. 만 61세의 나이였다.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빨리 그 순간이 올지 몰랐다. 루게릭 진단을 받은 지 2년여 만이었다. 남은 가족들은 짧은 논의 끝에 아버지를 의성으로 돌려보내드리기로 했다. 화장 후 재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원래 가고 싶어하던 할머니 묘소 부근은 큰 도로가 생기면서 접근이 어려워진 탓에 포기하고 생전 아버지가 차순위로 얘기하시던 의성 선산의 문중 어른들이 묻혀계시던 곳 한 켠 잘 생긴 소나무 아래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아버진 비록 죽어서나마 돌아간 고향에서 행복하실까. 지금이라면 그게 뭐 어렵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기왕이면 살아계실 때 의성의 농가 한 채 임대해 반년 정도라도 모셨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아버지가 투병생활을 하던 그 때의 난 너무 어렸고(삼십대 초반) 이기적이었으며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만 아는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면서도 늘 유년시절 의성에서 살았던 추억이 노스탤지어처럼 나를 위로하곤 했었다. 태어나서 10살 무렵까지 겪었던 추억이니 기억마저 가물가물한데도 넓은 마당과 우물, 집 뒤편 감나무, 동구 밖으로 이어지던 작은 길, 자전거를 태워주시던 할아버지, 사탕이며 곶감 등을 벽장에 숨겨뒀다가 하나씩 꺼내주시던 할머니, 앞산과 뒷산이 둘러싸고 있고 집집마다 끼니때면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던 풍경, 저수지와 사과과수원이 어우러졌던 마을 전체 풍경, 그곳을 마구 뛰어다니며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양 보냈던 추억들이 반백살을 지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작은 위안을 준다. 서울에서의 시간보다 내 유년은 의성에서의 시간만이 남아있다. 아마 내가 지방 소도시에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유년시절의 경험들이 분명 한 몫 했으리라.  


혼자 안동을 취재 다니다 어느날 문득 의성으로 차를 몰았다. 안동은 경북도청 소재지이자 경북 북부의 거점도시이지만 의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늘, 사과 등이 주 생산을 이루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아버지가 계신 선산만 가볼까 했다가 남동생에게 주소(본적지가 여즉 의성의 그 집이다)를 물었다. 맙소사 거대한 자동차 전용 도로가 그 마을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돌아가신 친 할머니 산소가 있던 앞산이 일부 깍여 도로가 되었다. 어리둥절하면서 네비게이션을 따라 도로를 내려가니 ‘아!’ 탄성이 나온다. 


교회 오갈 때 보았던 마을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 길과 논밭이 조금 정돈되었을 뿐 모양은 그대로다. 집 모양은 그때와 달라졌지만 대략의 위치와 우물, 뒷마당의 감나무를 보고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 집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물이야 천년이 지나도 우물터가 살아있으니 그렇다 치고 감나무마저 예전 위치에 있으니 너무 신기했다. 친하게 지내던 친척 언니의 집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큰 어머님이 여전히 살고 계시다는데 미리 얘기하고 온 게 아니어서 문을 두드리기 미안하고 어색해 집 앞에 잠시 서성이다 그냥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당시 앞산으로 불리던 자동차 도로 너머에 있던 산이었다. 당시 가을이었는데 온통 알록달록 단풍이 너무도 예쁘게 물들고 있었다. 아 그러면 나는 어렸을 때 저 단풍을 매년 보았단 말인가? 평범한 시골의 작은 마을이지만 그 풍경이 평범해서 더욱 아름다웠다. 차는 한 쪽에 세워두고 혼자 흥분해서 마을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누가 있었으면 분명 말이라도 시켰을 거 같은데 주민들은 일이라도 나가셨는지 동네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무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지나온 것 같은 벅찬 마음도 들었다. 추억이란 이런 거구나 싶어서 혼자 감격했다. 


그러니 분명 청년기까지 그곳에서 추억을 가진 아버지에게는 서울 생활이 40년이 넘어도 고향만이 유일하게 노스탤지어가 되었으리라. 정신이 육체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모진 병에 걸리셨으니 혼자 누워 맞은 편 하늘이 간신히 끝에 걸려있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제 세상인양 맘껏 다니던 의성에서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어땠을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불치병에 걸림으로써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삶을 마감한 아버지는 나에게도 또 다른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살아있을 때 더욱 즐겁게 살라는, 특별하지 않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그 메시지는 ‘그래 인생 뭐있어, 가는 거야!’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면 나는 종종 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인 작은 소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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