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안동 아버지와 나 1)
내 기억에 안동을 제대로 둘러본 것은 앞 챕터에도 언급했던 가이드북 취재를 위해 방문하던 때(2012년)가 처음이었지만 사실 안동은 내게 그리 낯선 곳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가까운 고장이다.
나의 아버지는 안동 아래 위치한 의성이 고향이신 분이다. 의성읍 중심지에서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이 의성이니 의성 토박이가 맞다. 비록 중학교까지는 의성에서 나오고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그리고 스무살에는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다니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잡게 됐지만 결국 돌아가실 때 이승에서 안착지로 선택한 곳은 의성이었다.
의성은 내게도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아래 동생이 연년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난 일찍 엄마젖을 떼고 돌 무렵부터는 의성의 친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삼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손아래 여동생과는 연년생, 막내 남동생과는 3살 터울이라 유년시절 대부분을 의성에서 키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덕에 드문드문 떠올려지는 내 유년시절 추억의 대부분은 의성의 작은 깡촌에서의 에피소드들이다. 장에 가신 할머니를 기다리기 위해 버스 도착 시간 1시간 전부터 고모 손을 잡고 신작로(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새로 낸 길을 이르는 말) 앞까지 가서 할머니를 기다렸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도 할머니였지만 아마도 장에 가신 할머니가 사오는 왕눈깔 사탕이랑 센베이 과자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 간절함이 컸던 탓인지 신작로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던 내 모습은 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가끔 꿈에 나타나곤 했다.
의성 동네에서 이웃에 살던 먼 친척 언니, 동생과 들판과 뒷산을 뛰어다니며 각종 놀이를 했고 교회를 가는 안식일이면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예쁜 것을 차려입고 마을 어귀에 있던 작은 교회에도 다녔다. 서울 본가에라도 다녀오는 날이면 같이 놀던 언니와 동생들은 식전 댓바람부터 대문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불렀다. 시골에서는 굳이 대문을 잠그지 않고 지냈는데 식전에는 남의 집에 찾아가는 게 아니라는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언니는 결코 마당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대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전날 늦은 밤에 도착했는데 시골 아이들은 내가 왔다는 걸 언제 알았는지 동만 트면 대문 앞으로 와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도착한 날 밤에만 해도 서울말을 쓰던 나는 언니의 부름에 눈을 떠 배시시 나가서는 바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곤 했다. 지금은 사투리로 말할라 치면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언어에 유연한 그때는 의성에 도착하면 하룻밤 만에 바로 경상도 사투리 패치를 갈아 끼고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으로 사투리를 구사하곤 했다.
친할머니가 내가 9살이 되던 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집에서 염을 하고 꽃상여가 나가는 장례문화를 경험한 것도 그때였다. 할아버지는 2년 후 새 할머니를 만나셨고 내가 11살이던 겨울에 의성에서 강원도 정선으로 이사를 가셨다. 나도 더 이상 의성을 갈 이유가 없어졌다. 이후엔 아버지와 엄마만이 돌아가신 할머니와 선친들 묘소, 친척들의 대소사에 참여하느라 1-2년에 한 번 의성을 가셨을 뿐이다. 이후 내가 대학에 합격한 후 아버지가 의성 친할머니 묘소에 가서 인사를 하자고 해서 따라갔던 적이 있다. 커서 만난 친척 언니가 그때는 참 어색해서 얘기도 잘 못나누었던 것만 기억난다. 오히려 지금 만나면 서로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참 많은 얘기를 나눌텐데.
안동은 의성으로 가던 입구 같은 곳이었다. 서울에서 의성을 갈 때면 무조건 청량리역에 가서 중앙선 기차를 탔다. 기차가 팔당과 양평, 원주, 제천, 단양, 영주를 지나 안동에 이를 때면 의성에 다왔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지금처럼 빠른 기차가 없던 그때 청량리역에서 의성역까지는 모든 역에 다 서는 비둘기호는 8시간, 지금의 무궁화호 같은 통일호만해도 6시간이 넘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당연히 기차에서 먹을 각종 간식(주로 삶은 계란과 고구마, 감자, 주황색 그물에 들어있던 귤)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 그 긴 여정마저 난 소풍처럼 즐겼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날 아직 미취학생이라고 속여서 기차를 태웠고 당연히 자리를 배분 받지 못해서 명절 등 사람이 많을 때면 어른들 무릎이나 자리 사이에 끼어 앉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세로 의성까지 오가곤 했다. 그러니 영주나 안동 정도에 이르면 사람도 많이 내려 자리가 생기기도 했고 이제 좀 만 참으면 의성에 도착하니 안동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싶다. 기차 창밖으로 바라보던 기차 이정표에 써있던 안동이라는 두 글자가 유독 크게 다가온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안동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낀 적이 있는데 가이드북 취재를 하러 안동을 처음 방문할 때 안동에는 의성김가 충순공파 종택인 학봉종택이 존재하고 있다. 취재를 다니다가 궁금해서 그곳을 들려보기도 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인상적인 깔끔한 고택이었다. 지례예술촌에서는 의성이 본이신 촌장님께 나도 본이 의성이라고 얘기하자 아버지 항렬을 먼저 물어오셨고 먼길 왔다며 더욱 친절하게 집안 곳곳을 안내해주시기도 하셨다.
안동과 의성은 함께 묶인 동네같았다. 아버지가 2년여의 투병 생활 끝에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하고 의성으로 돌아간 후에는 의성과 함께 안동은 늘 세트로 나에게 인식되었다. 열 일곱에 고향을 떠나온 아버지는 투병 생활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우리 남매들을 불러놓고 자주 의성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하셨다.
중앙고속도로가 생겨도 의성은 여전히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30분은 가야 하고 아는 친척분들도 생을 마감하시거나 의성을 떠났는데 아버지 당신은 화장 후 재를 의성에 묻어달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돌아가실 때 아버지 나이는 만 60세. 백세 장수 시대라는 요즘에 비하면 너무 일찍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