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절대평가다
술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같은 안부인사로 시작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회포를 푼다. 그러다 술에 잔뜩 취한 한 명이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주제 거리로 꺼낸다. 그러면 순식간에 분위기의 색깔은 검은색이 된다.
어두워진 분위기. 메인 이야기 주제는 '자신의 불행함'이다. 누군가가 불행을 꺼내놓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쉽사리 자신의 불행을 말하기 시작한다. 너의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더 큰 불행들을 꺼내온다. 어느새 술자리는 '불행 경연대회'가 되어간다. 승자가 얻는 것은 찝찝한 기분뿐이다. 패자가 얻어가는 건. 이 대회에서조차 졌다는 패배감일 뿐이다. 그럼에도 승자가 가려지기 전까지는 이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학교에서 위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일까. 우리는 누구보다 남을 위로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저 자신의 큰 불행을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의 불행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작게 만들어주는 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불행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라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불행의 크기가 어쨌든. 그건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내 앞에 실재한 고통도 충분히 힘든데. 느껴지지 않는 상대방의 고통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기에 불행은 절대평가다. 타인의 고통의 크기가 내 고통의 크기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저 불행은 '불행하다' 그뿐이다.
사실 불행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공감'을 받기 위해서이다. 따뜻한 공감을 받으면 그 불행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도. 짐을 나눠 들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다. 나 혼자의 문제에서 우리의 문제가 되는 거다. 물론 짐을 같이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이미 짐이 너무 많아 자신의 삶이 버겁다면. 굳이 들어줄 필요는 없다. 다만, 아직 삶이 살만하다면, 짐을 들만 하다면. 타인의 짐도 살짝궁 들어주는 거도 나쁘진 않다. 타인의 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더욱더 끈끈해질 거다.
불행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 더 큰 불행으로 덮는 건 승자 없는 대회가 시작되는 거다. 이제는 더 큰 불행을 주기보단. 따뜻한 공감의 말을 전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