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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귤 Nov 20. 2016

옛 글을 읽다가

옛날에 끄적인 글을 보다가 눈에 띈 한 글.

사실 뭘 담고 싶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 답지 않은 긴 분량에 놀라 꼼꼼히 읽어봤다. 딱히 연애도 제대로 한 적 없고,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적도 없는 내가 이런 글을 쓰다니

어지간히 커플들이 부러웠나 보다.

고작 1년 하고 7개월 전 글이지만, 그때의 나 역시 지금처럼 외로웠나 보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 사람과 저녁 약속을 하고, 나는 즐거운 금요일 만찬을 위해 꼼꼼히 장을 봤다.

그 사람이 평소 좋아하는 요리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레시피를 찾고, 못난 솜씨지만 정성스럽게 요리를 했다. 그 사람이 이번엔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라는 기대와 밥 먹고 나선 뭐하면서 보내지? 같은 소소하며 행복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약속시간까지 5분 정도 남겨놓고 마지막 요리가 완성될 때쯤 그 사람에게 카톡이 왔다.

아무런 사정 설명 없이 '나 못가'라는 세 글자. 나는 잔뜩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고 너무 좋아해서 매일 일어나서부터 생각하고, 모든 것들에 신경 쓰면서 만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큼 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계속 카톡도 보내봤지만, 1은 사라질 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화가 났다. 그러자 처음엔 서운했던 감정이 점점 더 격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나를 똑같이 생각해주지 않다고 느끼는 게 이렇게 화가 날 줄 이야.

    이젠 뭔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이때까지 '연애는 손해, 이득 이런 걸 따지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진실되게 하는 거야.' 라며 매번 주위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녔는데, 그랬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뭔가 분했다.

화에 분한 감정까지 드니까, 그 사람이 더 미워졌다. 이제까지 쌓아왔던 마음과, 서운했던 일들이 속사포처럼 입에서 쏟아졌다. 생각해보면 그것들도 다 그 사람이 날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다고 느껴져서 그랬던 거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분하고 화가 났다. 미리 만들어 둔 요리는 이미 식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이 뜨거웠다.

    홀로 식탁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분노 섞인 중얼거림을 반복했다. 약속시간이 지난 지 한 시간이 넘어섰지만, 여전히 1이란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보면 볼수록 입맛도 뚝, 기분도 푹 다운돼서 애써 차린 밥상을 도로 치우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으로 가보니 화면 안으로 그 사람이 보였다.

분명 만나면 욕부터 막 퍼부어주려고 다짐했는데, 막상 보니까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도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잔뜩 화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따지려고 했는데, 말을 시작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상황설명과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에 문제가 생겨서 못 올 뻔했는데 빨리 처리를 잘해서 지금 달려왔다고, 배터리가 나가서 제대로 말도 못 전해줘서 미안하다고, 연락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충전할 생각을 못했다고, 그래서 바로 마치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치맥을 사들고 달려왔다고.

    주절주절 변명을 하는 그 사람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진심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귀여운데 내가 이 사람을 어찌 놔둘 수 있을까. 그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날 생각해 주지 않는 거 같아서 서운했는데, 이 사람도 이 사람 나름대로 나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게 집중하면서 살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내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그동안 이 사람이 날 제대로 바라보고 있단 걸 못 느끼고 있던 게 미안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날 생각하진 않지만, 언제나 내게 달려와 내 옆에서 날 제대로 바라봐주는 사람. 역시 난 이 사람이 좋다. 


PS.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한 죄로 내가 차린 음식을 다 먹고, 그 뒤에 나랑 같이 치맥도 먹게 하는 '과식형'을 내렸습니다! 


 

언젠간 이런 연애를 꿈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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