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꽃이 진 벚나무는 평범하다.
꽃이 한창일 땐 수많은 이들이 바라봤지만, 이제는 그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로 걷는 사람만 있다. 엄마와 내가 그 길을 따라 걸은지도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를 집에만 있게 할 수 없어서 시작한 걷기가 이제는 습관이 돼서 촬영이 없는 날엔 늘 이 길을 함께 걷는다.
걷는 내내 우린 이야기를 나눈다.
주로 엄마가 말하고 나는 듣는다. 하모가 엄마 품에서 잠들었다거나, 곧 있을 베란다 공사, 아픈 친척에 대한 걱정, 누나의 논문 일정처럼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그 사소한 것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사계절이 지나갔다. 꽃과 여름 볕, 낙엽과 함박눈이 차례로 오고 갔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이야기 한 건 '아빠'였다. 보통 ‘가정법’으로 시작하는 이 대화는 만약 '지금도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다면', '지금 이 길을 같이 걷고 있다면'처럼 각자 상상 속 그의 모습을 꺼내어 현실에 포갠다. 그게 아니면 서로가 기억하는 아빠 얼굴, 그가 자주 했던 말, 습관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기하게도 정말로 아빠의 땀냄새가 나고, 손끝에서 그의 피부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흔히 '인간의 기억'을 낱장으로 구분된 사진 모음으로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아빠를 보내고 난 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기억이란 현재와 분절된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이어져 있다. 그러기에 나에겐 장노출로 찍은 한 장의 사진처럼 보인다. 비행기가 지나간 길에 생긴 비행운처럼, 장노출로 별을 찍었을 때 둥그고 긴 빛의 띠가 생기는 것처럼, 내가 살아온 시간의 방향과 모양을 따르는 빛이 아주 먼 옛날부터 내 발뒤꿈치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빛 안에 아빠가 계시다.
꽃이 떨어진 벚나무를 보면서, 아빠와 내가 나눈 시간이 꽃이었나 생각해본다.
허나 꽃이라 부르기엔 대부분의 시간이 평범했다. 내 기억 속 그는 그저 밥 먹을 때 옆자리에 앉아 있고, 가끔 내 이름을 불러 뭔가를 물어보며, 내가 일하러 갈 때 현관 앞에서 신발 신는 걸 지켜보고 계시다. 그 당시, 그 순간들은 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꽃 보듯 그 순간을 떠올린다.
아마도 그 이유는 더 이상 그와 '평범하다'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꽃은 다시 돌아와 피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엄마와 이 길에서 보낸 사계절은 우리가 아빠 없이 보낸 첫 사계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더더욱 이 평범한 길이 소중하다. 이 시간은 언젠가 꽃으로 기억될 걸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은 모두 '아빠'라 적었다. 그 평범한 호칭을 더 이상 부를 수 없어 아쉽고 마음 아프다. 대신 많이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