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성 Dec 27. 2023

백마리 개, 비난받지 않을 자신감

24. 이딴 일이 되고 있다.

며칠이 지났다. 추운 겨울이었고, 이유 없이 행복했던 크리스마스도 지났다. 영하에 머물던 공기는 이제 갓 영상을 넘었고 햇살은 봄날처럼 따습다. 한 마리가 새로 들어왔고, 한 마리는 입원을 했었다. 그리고 한 마리는 수술을 마치고 오늘 퇴원했다. 동물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안아주지 않는다. 한 마리씩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리 지어 사는 개들을 돌보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아팠나 보다. 돌봄이 필요한데 내가 그러하지 않아서 아팠나 보다.


동물병원에서 누군가 물었다. 이 일을 왜 하는지. 내가 답했다. 개와 사람이 함께 사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다시 묻더라. 이미 개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냐고.


“유기견으로 불리며 사회로부터 격리된 개들을 말하는 겁니다.”


방법은 찾았냐는 물음을 기대했지만 여기서 끝이었다. 혼잣말로 이리 답했다. 지금 시점에서 유기견숲(내가 운영하는 보호소)이 내가 아는 전부입니다.




입양으로 개들을 사람 곁으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틀렸다. 구조하는 순간 입양 갈 수 있는 개와 그러하지 못한 개로 나누어진다. 어떤 규칙이나 원칙에 의해 갈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직감이고, 때로는 각자의 무능함이 기준이 된다.


사나운 개가 많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힘겨운 시간들을 보낸 누군가가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예민하고 화가 넘쳐 폭력적인 모습이 정상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나운 개의 모습이다. 조금 정도의 생각조차 게을리하는 각자의 무능함에 이들은 살아있는 채로 죽어간다. 나는 이를 생매장이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일 뿐이다. 입양하고자 하는 이가 없으면 입양을 보낼 이유도 사라진다. 사나운 개를 입양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없다면 사나운 개를 입양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입양을 보낼 것이라 자신한다. 변명이고 핑계이다. 각자의 무능함을 남들의 대의에 묻혀 지워내는 변명거리에 불과하다.




유기견은 보호받는 적이 없다. 계속해서 갇혀 있었을 뿐이다. 구조 전 뜬 장(바닥이 철망으로 되어 있는 대소변 처리에 용이한 형태의 견사)에서 구조 후 견사(뜬장과 바닥 외에 아무 차이가 없다.)로 갇힐 뿐이다. 입양이 되더라도 대부분 사람이 사는 공간에 갇혀 지낸다. 먹고 재우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보호라는 단어의 의미를 자처하게 되었고, 다들 유기견 보호를 밥 먹이는 일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유기견 보호소를 10년 넘게 해 왔다. 지금껏 이들을 보호한 적이 없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개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짓이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면, 유기견을 돌본다는 이들이 어떤 쪽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나아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보호를 하지 않아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말티즈이다. 나이는 10살이다. 어디서 왜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추억팔이하듯 떠벌리기 싫기에 기억하지 않는다. 치주염이 심해져 아래 턱뼈가 녹았다. 일상생활에 변화는 없었다. 던져주는 간식에 신나게 달려드는 모습만으로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괜찮다고 말이다. 비난할 수 있겠는가? 유기견을 돌보는 이가 돌보던 작은 개가 이렇게 아프다. 나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당신은 허락한 셈이다.


유기견 보호는 이런 일이 되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마리 개, 하반신 마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