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을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교회 종소리에 부비적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태양마저 곤히 잠들어 있는 새벽 5시, 아이의 첫걸음마처럼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누구보다 느리게 걷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산티아고를 향하기로 한다.
발등 부기는 여전히 봉긋 솟아올라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진통제가 제 역할을 하는 건지 통증이 조금 가신 느낌이었다.
터벅. 터벅. 배낭을 메고 호기롭게 나왔지만 칠흑같이 컴컴한 어둠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끔뻑 끔뻑, 화살표를 찾다 멍하니 길 위에 서있는데 '반짝반짝' 등대의 빛처럼 앞에서 환한 빛이 나를 향해 비추었다. 미동도 없는 나를 향해 다시 한번 '깜빡깜빡' 하며 또 한 번 신호를 보내며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두 번째 빛이 내게 들어온 순간 누군가 앞에서 나의 길을 밝게 비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을 따라 걷다 보니 어둡던 하늘이 서서히 파랗게 변해갔다. 이내 붉게 물들고 구름 너머에서 한 줄기 햇살이 희망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실버라이닝.' 고개를 돌리니 넓게 펼쳐진 들판의 해바라기들 해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고 그늘 한점 없는 무더운 날이었지만 누군가가 비춰준 작은 불빛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루의 여정을 먼저 시작했지만 발걸음이 느린 덕분에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다. '부엔까미노' 라는 인사와 함께, 낯익은 얼굴의 순례자, 처음 보는 순례자들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산티아고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중, 나의 걸음에서 고통의 흔적이 느껴졌는지 한 커플이 속도를 내 발걸음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갈색 곱슬머리에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의 여자와 짧은 갈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키가 큰 남자는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라는 로고가 박힌 커플티를 입고 있었다. 바스크 출신인 두 사람은 결혼식을 마치마자 산티아고로 신혼여행을 왔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이레, 남편은 알렉스예요."
"올라, 요 소이 꼬레아나. 메 야모 아란. 엔깐따다(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아란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스페인어를 총동원하여 대답하 신혼부부 레이레와 알렉스는 눈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레이레는 당찬 목소리로 자신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신혼부부랍니다."
"결혼 축하드려요! 근데 신혼여행으로 도보순례를 선택하디니 진짜 멋었어요. 저도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산티아고로 신혼여행으로 오고 싶어요."
알렉스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을 쑥 내밀고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진심이세요? 저는 레이레가 신혼여행으로 카미노 순례를 하자고 했을 때 저는 반대했어요. 솔직히 정말 싫었거든요. 허니문은 평생 한 번뿐 인데.. 산티아고라니 너무 하잖아요. 물론, 카미노는를 통하여 특별한 경험할 수 있지만 신혼여행으로 오기에는 좀.."
그는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허니문만큼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둘만의 시간은커녕 100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잠을 자고 생활해야 하잖아요. 그런 경험은 허니문이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레이레는 허니문이어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그의 눈빛에서는 레이레를 향한 깊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레이레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저 모나리자처럼 신비한 미소만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레이레, 알렉스를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사랑의 힘이 아닐까요? 하하... 농담이에요. "
우리는 모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호흡을 짧게 내뱉었고 생각이 정리된 듯 천천히 입을 뗐다.
"산티아고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길 위에서는 희. 노. 애. 락을 다 경험할 수 있죠. 저도 비록 저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그 말 뜻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고 알렉스는 여전히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레이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자고 했어요. 단순한 쾌락을 넘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바로 '카미노데산티아고' 구요."
그녀의 얼굴에는 확신과 결의가 가득 차 보였다.
"서른이 넘으니 아주 조금 알겠더라고요. 삶은 늘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나 일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한 순간보다 힘들고 견뎌야 할 순간들이 더 많아지는 것도요. 알렉스를 진심으 사랑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살짝 별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전 카미노를 통하여 서로의 몰랐던 부분도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어요. 서로를 의지하며 이 긴긴 레이스를 잘 끝낸다면 결혼 생활도 현명하고 슬기롭게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과 현실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걷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알렉스처럼 그녀의 말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라면 설득을 당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신부가 신혼여행지로 산티아고를 선택한 것도, 그 결정을 아낌없이 받아준 신랑이 알렉스도 멋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