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있는것처럼, 모든 순례자들에게는 정도의 차이일 뿐 순례를 통한 크고 작은 영광의 상처가 있다. 어떤 사람은 허리로, 또 다른 이는 무릎으로 오기도 하는데 나는 온전히 발등과 발바닥으로 왔다. 어제 컨디션이 너무 좋아 오버페이스를 해서 그랬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고 발등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어쩐지 어제 너무 운수가 좋더라니..' '운수좋은날' 김첨지가 살짝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신발이 맞지 않아 부풀어오른 발에 억지로 신발을 맞춰 신기로 했다. 힘들어도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듯, 아파도 계속 걸어야 하는 게 순례의 길이니까.
신발끈을 묶는 동안 순례자들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이따 봐요.'라는 한마디를 건넨 뒤 산티아고를 향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신발끈을 다 묶었지만 도저히 걸을 자신이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한올도 없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순례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신비로움과 차가움을 담고 있었고팔과 다리에 새겨진 문신들은 마치 '프리즌브레이크' 석호필을 생각나게 하며 이탈리아 마피아같은 묵직한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어. 그도 갱생을 위해 걷고 있는 걸 거야.' 혼자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내려가며,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자판기어떻게 사용하는건지아세요?."
자판기 사용법이 한국과 다르지는 않겠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앞에 있는 자판기를 손으로 가리켰다.나의 황당한 질문에 무표정하고 경직되었던 그의 얼굴이 무장해제 되었고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자판기사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 팔을 잡고 일어나세요."
세비야 출신 '마누 하폰'과의 첫 만남이었다. 마누는 내가 낑낑거리는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며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고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발을 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저는 한국에서 온 아란이라고 해요."
"별말씀을요. 저는 세비야에서 온 마누 하폰이에요, "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꼭 문신과 머리가 프리즌브레이크 스코필드 같아요." 초면이었지만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목이 간질간질거렸고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가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부축해 주었다.
"제 성이 왜 하폰인 줄 아세요?"
"하폰이 뭐예요?" 하폰이 무슨 뜻인지 몰라 반문했다. 이탈리아 마피아, 프리즌브레이크 석호필은 온데간데없고, 순하고 친절한 세비야 청년만이 눈 앞에 있었다.그의 눈빛은 따뜻하고 미소는 편안했다.
"하폰은 일본이라는 뜻이에요. J-A-P-O-N, 스페인어에서는 J를 H[ㅎ]로 발음하니까 하폰이 되는거죠. 아무튼, 저의 뿌리는 일본에 있어서 성이 하폰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럼 전 아란꼬레아입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 스페인과 일본이 무역을 했었고 소수의 일본인들이 스페인에 정착했다고 한다. 마누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누를 다시 보니 눈동자 색이 굉장히 짙은 갈색이었고, 다듬어진 눈썹은 살짝 팔자눈썹에 가까웠다.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산티아고를 통하여 즐겁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느 정도 걷는 게 익숙해지기도 했고 걸음이 빠른 그를 내 걸음 속도에 맞춰 붙잡아둘 수 없었다. 모두 자신만의 속도로 길을 마쳐야 하는 게 산티아고니까. 알베르게에서 보자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그에게서 팔을 뺐다.
"저 때문에 천천히 걷지 않으셔도 돼요. 도와주신 덕분에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했어요. 이따 알베르게에서 만나요."
"부엔까미노."
마누는 성큼성큼 자신만의 속도로 가더니 이내 점이 되어 멀어졌고 나 또한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걷다가 온따나스 알베르게에서 같은 방을 썼던 스페인 오비에도 출신 마리아와 아나를 만났다. 그녀들은 나에게 다가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YOU CAN'T WALK ANYMORE. OR HOSPITAL"
그늘 한점 없는 뜨거운 햇빛 아래, 마리아와 아나는 내 걸음걸이를 보고 더 이상 걷는 건 무리라며 순례를 멈추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산티아고는 인생의 축소판이라 나만의 무게를 지고 완주하고 싶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고집을 부리며 그들의 제안을 극구 사양했다. 그들은 "Cuidado por favor(조심해)"라는 말을 남기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10km를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2시간 남짓이면 충분했겠지만 무려 3시간 반이나 걸렸다. 마을 어귀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니 나와 함께 걸었던 분들이 마을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한참전에 도착하여 커피를 다 마셨지만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이 되어 길을 나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30분 넘게 꼬박 카페에서 기다리셨고 로쵸아저씨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란, 신발이랑 양말 벗어봐."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자, 붉게 부어오른 발등 위에 양말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로쵸아저씨는 이리저리 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겁을 잔뜩 주며 말씀 하셨다.
"아란, 네가 산티아고를 완주하고 싶다면 오늘 꼭 병원에 가야 해. 이 상태로 더 걸었다가는 산티아고는 커녕 평생 못 걸을지도 몰라. 글로리아도 무릎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같이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아."
다른 사람들도 로쵸 아저씨 말에 동의했고 결국 글로리아와 나는 택시를 타고 스페인 보건소 같은 작은 병원에 갔다. 시골마을이라 부르고스에서 의사가 몇 시간씩 파견진료를 봐주는 진료소였다.
병원에 도착하고 우리는 진료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글로리아는 전화를 하러 갔고 옆에 있는 스페인 아주머니가 말을 거셨다.
"돈데?(어디?)"
"소이 꼬레아나.(저는 한국사람이에요.)"
"돈데 치카?(네 친구는 어디 출신이니?)"
"까딸란. 바르셀로나.(까딸란, 바르셀로나.)"
모르는 사람이 스페인어로 말을 걸면 며칠 전까지는 "노 아블라 에스파뇰(저는 스페인어를 못해요.)"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었는데 스페인어를 알아듣고 대답을 할 줄 아는 스스로가 대견하고 신기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하고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고 의사가 내 발을 진찰해 주었다. 글로리아와 의사가 상당히 빠른 스페인어로 주고받았고 통역을 해주었다.
"운동화가 너무 부드러워 발목과 발등을 충분히 잡아주지 못해 발등이 많이 부었어요. 산을 오르락내리락하고 하루에 몇십 킬로씩 걸으니 무리가 가죠. 게다가 평발이니 피로감도 쉽게 느낄 수밖에요.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해요. 만약 그게 여의치 않으면찬물에 발을 담그고 발마사지라도 해주세요."
최대한 발을 쓰지 않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와 함께 진통제와 소염제를 처방받았다. 약을 받고 다시 택시를 타고 알베르게로 갔다. 주변에는 드넓은 초원과 햇빛 한점 없는 메세타평원이 도로를 가운데 두고 펼쳐져있었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 버스를 타고 간 호주 커플과 택시를 타고 가는 나의 모습과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도 이 길을 걸었어야 했는데. 진짜 순례를 했어야 했는데.. 어제 아침에 부르고스에 만난 호주 커플과 별반 다를 게 없네.'
택시는 달리고 달려 아주 작은 스페인 마을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황톳빛 건물이 알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었고 보기만 해도 시원한 수영장이 있었다. 알베르게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식당, 슈퍼 등의 편의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의사 말대로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스페인의 햇살로 일광욕을 하며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의 등을 살살 밀었다. 북아일랜드 출신 간호사 개리였다. 지난번 콤피드를 주고 어깨 마사지를 해준 이후로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한국 문화를 알려달라고 늘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게 참 귀여운 친구다.
수영장에 앉아 한국어를 알려주고 북아일랜드 슬랭을 배우기도 했다.
"Bout ye" 북아일랜드어로 'Howa are you?'라는 뜻인데 생각보다 발음이 어려웠다. 내 발음이 틀렸다면서 다시 그를 따라 해 봤지만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가리. 그렇게
"포기할래, 나는 영어 잘 못하겠어."
결국 북아일랜드 슬랭을 배우는 건 포기하고 그가 좋아하는 영국밴드의 노래를 함께 들으며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