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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Aug 22. 2024

메세타평원

황금빛 바다와 같은 평원과 스페인어 선생님

 부르고스를 지나 레온으로 향하는 길, '메세타평원'이라 불리는 광활한 밀밭이 펼쳐진다.많은  순례자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길목이자, 많은 이들이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여름이면 나무 한 그루, 그늘 한 점 없이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대성당을 지나 천천히 길을 나섰다. 두리번거리며 화살표를 찾던 중 한 순례자 커플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버스정류장을 찾고 계세요?"


"네? 버스요?"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뇨. 화살표를 찾고 있었어요." 내 말에 그 커플은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군요. 메세타 평원은 그늘도 없고 순례길 중에서 지루하고 힘든 길이라 저희는 레온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까 하는데 혹시 그쪽도 버스를 타고 레온으로 가실 계획이신가 해서 여쭤봤어요. " 


 그녀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다른 순례자에게 길을 물었고 나는 그들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버스를 타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 세명의 순례자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있던 순례자가 길을 앞장서기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보며 부러움보다는 온전한 순례와 인생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메세타평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일상이 일탈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할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순례이자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던 발등 통증도 가라앉았고 컨디션도 꽤 괜찮아졌다. 조가비와 화살표를 찾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빛 바다와 같은 메세타 평원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메세타평원은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인 듯 느껴져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카미노를 시작한 첫날, 초심으로 돌아가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무도, 그늘도 없이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옅은 구름이 강렬한 햇살을 막아주고 살랑이는 여름 바람이 땀을 식혀주어 오히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포기하는 메세타를 지나 30km를 걸어 스페인 작은 마을 온따나스에 도착했다.


 '온따나스(Hontanas)'는 인구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수많은 분수들로 가득 차 있어 마을 이름이 'Fontanas(분수)'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온따나스'는 산티아고 도보순례 중 발견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스페인 특유의 황톳빛이 매력적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지만 방 안에는 단 3개의 이층침대만이 놓여 있어 순례자들에게 아늑한 편안함을 선사했다.


 씻고 빨래를 마친 후, 일기장을 챙겨 알베르게 앞 벤치에 앉았다.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한 스페인 할아버지가 옆에 앉으셨고 스페인어로 말을 건네셨다.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호세가 가르쳐준 몇마디를 떠올리며 스페인어로 대답했다.


"Mi espanol poquito, Soy Coreana. (미 에스파뇰 뽀끼또, 소이 꼬레아나- 저는 스페인어 조금밖에 못해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최선을 다해 스페인어로 소통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멈추지 않고 쉼없이 스페인어로 말씀하시며 내 스페인어 선생님을 자처하셨다. 20분 넘게 스파르타식으로 스페인어를 배웠고 Uno, Dos, Tres.. (1,2,3)을 배우다가 단숨에 20까지 셀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옷을 가리키며 "Negro mucho Calor"(네그로 무쵸 깔로르, 검은색은 덥다) " 그는 내 옷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스페인어로 검은색이 네그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내 피부를 가리키며 "모래노(구릿빛)", 자신의 흰색 옷을 가리키며 "블랑코(하양)"을 알려주셨다.


"Camino de Santiago es una Gran Familia"

"Camino de Santiago es una Gran Familia"

"Camino de Santiago es una Gran Familia"

"Camino de Santiago es una Gran Familia"


 할아버지는 한 문장을 주문을 외우듯 한 문장을 반복해서서 말씀하셨고 무지한 나는 '카미노데산티아고' 라는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때 다른 알베르게에 묵고 있던 프랑스 친구 실바가 구세주처럼 짠 하고 나타났다. 실바는 테라피스트인데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능력자였다.


"실바,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카미노데산티아고는 하나의 큰 가족이라는 뜻이야." 그의 통역에 나는 할아버지를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이 되고 서로를 걱정하고 격려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같은 산티아고 길. 단순한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삶의 한 페이지가 서로의 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며 가득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메세타평원
메세타평원
공립알베르게, 2층 우리방
스페인어 선생님 & 실바와의 종이접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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