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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Sep 12. 2024

Kaixo, 존과 이니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닭울음소리보다 먼저 일어나 다시 혼자만의 길을 준비한다. 바스락 거리며 짐을 챙기는데 글로리아가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묻는다.


"아란, 벌써 가려고? 오늘 20km만 걸으면 되는데.. 서두르지 않아도 돼."

"일어났어?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일찍 출발해야 다른 사람이랑 속도가 맞을 것 같아. 먼저 갈게."


"응 그래. 조심하고. 아스따 루에고"


"부엔까미노"


 글로리아는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린다. 비겁하게 혼자만의 이별을 하고 알베르게를 빠져나왔다. 그녀에게 말한 것과 달리 발등 붓기도 가라앉았고 통증도 거의 없었다. 나의 비겁한 모습에 공기도 치를 떠는 듯 차가운 바람이 두 뺨을 살짝 아리게 스친다. 심호흡 크게 하고 심기일전하여 걷는다.


 태양도 글로리아처럼 구름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조용한 새벽. 며칠 전과 다르게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스산한 기운마저 맴돌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더듬거리며 노란 화살표와 조가비를 찾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늘도 제법 붉은빛으로 물들고 내 볼을 때리던 차가운 공기도 이내 따스한 공기로 바뀌었다.


 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등대처럼 저 멀리 반짝거리는 불빛이 보인다. 앞으로 걸어가니 'Open' 촌스러운 네온사인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침도 먹을 겸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팔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회색빛 곱슬머리 아저씨가 컵을 닦으며 힐끔 인사를 건넸고 나는 팅팅 부은 얼굴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올라! 부에노스 띠아스.(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부에노스 띠아스. 카페콘레체 뽀르빠보르(좋은 아침이에요, 카페라테 한잔 주세요.)"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커다란 배낭에 달린 조가비가 순례자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고, 주인아저씨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는다.


"데 돈데 에레스?(어디 출신이야?)"  

"요 소이 꼬레아나. 엔깐따다.(한국에서 왔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무이비엔(아주 좋아!)" 아저씨는 짧은 스페인어가 신기하고 재밌으셨는지 커피를 제조하시면서도 아저씨는 입을 멈추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아키.(여기)."


 아저씨는 커피와 함께 미니머핀을 서비스로 주셨다.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끼익~' 문소리가 들렸다. 순례자 2명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두 명의 순례자는 길과 알베르게에서 종종 본 낯익은 아저씨들이었다. 늘 반갑게 인사를 해도 돌아오는 건 찬바람 쌩쌩부는 형식적인 인사였다. 꼬리를 흔들며 사랑을 갈구하는 강아지도 열 번 꼬리를 흔들다가도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알면 꼬리를 감추는 법이다. 평소와는 달리 살짝 퉁명스러운 말투로 인사를 했다.


"올라. 부에노스 띠아스.(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저씨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웃으며 나를 향해 인사 했다.


"Kaixo(카이소.)" 두 아저씨들의 웃는 모습도, 카이소라는 말도 낯설었다. 혹시나 웃으면서 나를 욕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물어봤다.


"카이소? 무슨 뜻이에요?"

"바스크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야. 우리는 산세바스티안에서 왔어. 근데 왜 혼자 걷고 있어? 친구들은 어쩌고?" 아저씨들도 내가 많은 분들과 함께 걷는 걸 알고 계셨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나는 존이고, 여기는 내 친구 이니고."

"카이소, 존, 이니고. 저는 한국에서 온 아란이에요. 엔깐따다.(반가워요)."  


 카페 아저씨가 에스프레소 두 잔과 설탕을 놓았고 아저씨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아저씨는 30년 우정 기념으로 산티아고에 왔다고 했다. 휴가가 길지 않아 올해는 레온까지 걷고, 내년에 레온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까지 여정을 마칠 거라했다. 아저씨들의 우정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갑자기 친절해진 태도가 낯설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존아저씨,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디메.(말해봐)." 


 "저는 아저씨들이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어색한 미소를 짓고 힐끗힐끗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봤다. 존아저씨는 커다란 손으로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감싸며 만지작거렸고 이니고아저씨도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두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존아저씨가 입을 뗐다.


"음... 싫어한 건 아니고 신기했지, 그렇지? 이니고?" 이니고 아저씨에게 동의를 구했고 이니고 아저씨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맞지! 맞지! 새파랗게 어린 동양여자애 하나가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로 인사를 하고 다니지를 않나. 간호사도, 의사도 아닌 게 뽈뽈거리면서 오지랖 넓게 발을 살피고 다니지를 않나. 처음에는 가식같이 느껴진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


존이 손안에 있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니고 말을 거들고 나섰다.


"산티아고는 10키로 넘는 배낭을 메고 족히 30일을 걸어야 하는 긴 여정이니까.. 너도 제풀에 지쳐 진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어. 이니고랑 너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차갑게 대하기로 한 거지. 그런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 내가 인사를 받지 않아도, 너는 늘 한결같더라. 웃으며 인사하고 아픈 곳은 없는지 발을 살피는 게 말이야."  


존이 한숨 고르고 말을 계속했다.  


"음.. 그저께인가? 되게 작은 마을이었는데.. 마당에 작은 수영장이 있던 알베르게.."


"아~ 거기!! 알죠. 저 그날 병원 갔다 왔잖아요."


"맞지 맞지!! 마당에 앉아 있는데 꼬레아나가 병원에 갔다 온 이야기를 들었어. 아마 레이레였던 것 같은데... 그 신혼부부 있잖아.. 알지?"


 레이레와 알렉스도 바스크 출신으로 신혼여행을 카미노로 온 부부였다. 나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만난 적이 있다.


"레이레가 하는 말이 병원에 다녀와서 붓기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한대. 몸이 아프면 투정부리고 짜증내기 마련인데 너는 절뚝거리면서도 다른 사람들 컨디션 살피고 다닌다고 하는게 신기하다고 하더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가 너를 한참이나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늘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널 시험하고 평가했을까? 이 신성한 길에서 말이야.."


 존 아저씨 얼굴에는 미안한 마음에 가득 씌어있었고 애써 내 눈을 피하며 벽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을 바라보았고 이니고 아저씨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로시엔 또.(미안해.)"


"에이~ 아저씨도.. 제 오지랖이 낳은 결과이니 절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의 작은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얼리기도 하고, 녹이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얼리는 법이 동일하다는 것이  조금 기이할 뿐이었다.


"살룻(건강을 위하여)"


 우리 셋은 커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카미노를 응원했다. 며칠 뒤 아저씨들과 레온에서 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고, 수녀님한테 혼나가면서 아저씨들과 레이레커플과 수다를 떨었다. 한글로 아저씨들 이름을 노트에 적어주니 문신처럼 팔뚝에 새겨달라고 귀여웠던 아저씨들. Kaixo! 헤어질 때 인사는 바스크어로 배우지 않아 우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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