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정

산티아고에서 기다릴게

by 북극곰

30일간의 긴 정이 막을 내린다는 생각에 설렘과 아쉬움이 뒤섞여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뒤척이다 새벽 4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컴컴한 새벽의 적막 속을 걷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처음에는 노란 화살표도, 가리비껍데기도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식해서일까? 괜스레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지나온 길을 눈에 담는다. 뒤돌아본 길 위에는 수없이 많은 감정과 순례자들과 함께한 추억이 어른 거렸다. 오늘이 지나면 나를 인도해 주었던 화살표와 조가비도 더 이상 볼 수 없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던 중, 나의 길을 인도하던 화살표를 놓치고 말았다. 이리저 둘러보며 노란 화살표나 조가비를 찾으려 했지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위를 둘러보며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지만 순례자도, 순례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낯선 길이 펼쳐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구나.'


짧은 한숨을 내쉰 뒤,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밤하늘에 떠있는 밝게 빛나는 빛이 길을 비추는 듯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끌림에 이끌려 그 빛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순례자들의 실루엣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길 위에서 만난 순례자들의 모습에 긴장이 풀리며 작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부엔까미노."


어둠 속에서 익숙한 인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지만 따뜻한 인사가 가슴 한편에 스며들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부엔 까미노."


이 짧지만 깊은 교감이 '카미노데산티아고' 길이 주는 에너지와 온기를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국적도, 언어도 모두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이유 하나로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걸었던 시간들.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발걸음을 내딛자 짙었던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푸르른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배낭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길을 다시 재촉했다. 드넓은 소나무 숲을 지나는데 젖은 흙냄새와 솔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비에 젖은 흙길에서 발자국 소리가 이어지며 산티아고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쁨이 가득했다.


산티아고까지 4킬로미터.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스물다섯 끈기 없고, 인내심도 없어 하는 것마다 금방 그만두던 내가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Santiago de Compostela"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주변은 환호와 축하의 물결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고 길가에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순례자들의 산티아고 입성을 축하해 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움의 눈물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성취감. 그리고 동시에 묘한 외로움도 느껴졌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서로의 긴 여정의 끝을 축하해 주고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팔라스데레이'에서 크리스티앙과 키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함께 기쁨을 나눌 누군가가 없었다. 개리, 레이레, 알렉스를 찾으려 했지만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만큼이나 어려워서 결국 만날 수 없었다. 아마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것은 아마 크리스티앙과 키캐에 게 못되게 굴었던 벌이라고 생각했다. 면목도, 자격도 없었지만 이기적 이게도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나는 완주증명서인 '콤포스텔라'를 발급받고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런 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숙소를 몇 군데 추천을 받고 오비에도행 비행기 체크인을 하러 PC방으로 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메일을 받았다.


'아란, 잘 지내? 산티아고에는 도착했어?

오늘 우리도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 같아.

시간은 4~5시 정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산티아고 성당 앞에서 만날까?'


Kiss


-크리스티앙&키캐-


메일을 받는 순간 또 한 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원래 두 사람은 27일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40킬로미터를 걸어 나를 26일 산티아고에 도착한다고 했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는 반가움이 뒤엉켜 마음속 깊은 곳에 울려 퍼지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메일을 읽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눈물을 닦고 답장을 했다.


'크리스티앙&키캐,

올라! 께딸?

나는 방금 전 산티아고에 도착했어.

너희들을 거기에 두고 우겨서 왔지만 친구들은 만날 수 없었어.

사람을 떠난 벌을 이렇게 받나 봐. 미안해.. 정말...

키캐, 무릎도 아픈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나는 언제든 기다릴거니까.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Miss you'


-아란-


이제 그들이 아닌 내가 그들을 기다릴 차례다. 답장을 하자마자 바로 짐을 챙겨 PC방을 나서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갔다. 한 시간, 두 시간이고 아니 밤이 되고 하루가 지나도 나는 그들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릎도 좋지 않은 사람이 40킬로미터를 걸어오는 것에 비하면 너무 쉬운 일이니까.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성당 근처 기념품 가게에 들러 두 사람을 위해 산티아고 완주를 축하 커플 배지를 사고 성당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검은색 점퍼를 입은 크리스티앙과 연두색 스카프를 하고 있는 키캐가 보였다.



keyword
이전 03화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