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곰 Nov 24. 2024

루카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

 나를 깨워줄 손길도, 아침을 준비해 주던 친구는 이제 곁에 없다. 완벽하게 혼자가 된 나는 시계도, 휴대폰도 없이 오직 감을 믿고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새벽 어스름 속, 눈을 뜨고 방 한쪽에 놓인 커다란 시계를 보니 시침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잠을 청했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결국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몇몇 순례자들이 어둠 속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고 나도 그들을 따라 천천히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은 34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날이다. 닳고 닳아 바닥이 다 해져버린 운동화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릎까지 찌릿하게 전해지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여명의 어스름 속 해드랜턴의 작은 불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고 막막해도 멈추지 말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에 발끝으로 길을 더듬으며 여명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함께 알베르게를 나섰던 순례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었고 앞서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조차 감쪽같이 사라졌다. 새벽바람만이 나뭇잎을 스치며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환한 미소와 함께 "부엔카미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통증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천천히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비로소 깨달았다. 인생이든 길이든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방향만 맞다면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한걸음 내디뎠다. 내 속도대로, 내 방식대로.


 뚝. 뚝. 뚝.

 내 속도대로 걷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 갈리시아 날씨는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아일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가 멎고, 바람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자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소나무 향이 코 끝을 스치며 맴돌았다. 소나무 아래의 비석에는 '산티아고까지 25킬로미터'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응원의 글귀들이 잇따라 적혀있었다.   


 비석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물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서려고 할 때, 소나무 숲 끝자락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남성이었는데 가까워질수록 그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는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한 손에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는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그러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밀짚모자를 벗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순례자는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니고 짧은 턱수염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길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이탈리아 순례자임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여러 번 길에서 스치듯 만났었다. 하지만 이름도 묻지 않고 가벼운 인사만 나눈 사이였고 각자의 길을 걸었었다. 이탈리아 사람 중에서도 잘생긴 얼굴에 속하는 그의 얼굴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리운 마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게 된 나는 미소 지었고 그도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아픈 데는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의 질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당신은요? 다리가 좀 아픈가요?"

"아시 아시(그럭저럭)."


"못 본 사이에 스페인어가 많이 늘었네요. 며칠 전에 알베르게에서 로쵸와 장까를로를 만났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꼬레안치카, 당신의 얘기를 들었어요."


 그의 입에서 로쵸와 장까를로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은 순례길 초반에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이었고, 일주일정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함께 한 산티아고의 추억은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정말요? 두 사람이 나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은 당신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고 강하다고 했어요. 언제 어디서든 웃음을 잃지 않는다고도 했죠. 그리고.. "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멈췄다.


"고집이 세다고 했군요. 맞죠?"  


"맞아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 병원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했다면서요. 글로리아랑 설득하느라 한참 애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절뚝거리면서 걸었지만 병원은 정말 죽어도 가기 싫더라고요. 치료받는 것보다 길을 걷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당신이 산티아고를 임하는 태도 아닐까요? 일로 치면 책임감 같은 거?"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함께 소나무 숲을 걸으며 솔향을 맡았다. 그곳의 고요함과 신선한 공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잠시 후,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햇살이 구름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선을 하늘로 고정한 채로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또 있어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무엇이든 대답할게요. 뭔데요?" 그의 눈은 반짝이며 무엇이든 말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음... 이름이 뭐예요?"



 그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변했다. 우리 두 사람은 길 위에서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몇 번이나 길에서 마주쳤고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텐데도 아직 서로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산티아고가 가까이 오자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느낌이었고 이 순간 역시 나에게 소중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기억하고 싶었다. 이 길과 소나무 향기 그리고 길 위에서 함께 나눈 웃음도. 그의 이름도, 인생의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이 순간도 오래오래.. 웃음 속에서 그에게 정식으로 내 소개를 했다.


"저는 한국에서 온 아란이요.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하하하.. 저는 루카라고 해요. 이탈리아 로마에서 왔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당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이상하네요. 다들 '꼬레안치카'라고 불러서 그게 자연스럽게 당신 이름이라 생각했나봐요. 미안해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고요."


 그는 밀짚모자를 든 손을 가슴에 대고 처음 만난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통성명을 한 우리는 단순한 동행자가 아닌 진짜 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루카,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일까?"


"글쎄.. 모르겠어.. 아마도 이 길.. 모든 순간이 떠오를 것 같은데... 상상이 안돼."


 "루카, 나는 산티아고를 걸으면 내 인생이 180도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왔어. 그런데 아직 드라마틱하게 바뀐건 없더라.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할지도 모르겠고.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조금 막막하기도 해."


"아란, 나도 그래. 그래서 여기에 왔어. 이 곳에서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있을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답은 찾았어?"

"아니, 이 길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찾아봐야지. 어쩌면... 산티아고는 목적지가 아닌 새로운 시작점인지도 몰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비를 맞고, 소똥 냄새를 맡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인생에서 포기하고 싶거나 두려움이 앞을 가려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고 주저앉고 싶을때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배운 것은 확실해. 그래서 시작이 이제는 두렵지가 않아."  


'끝은 새로운 시작' 이라고 하는 루카는 나보다 훨씬 더 성장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와 함께한 짧은 시간이 어쩌면 이 길이 나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교훈일지도 모른다. 옆을 돌아보자 그의 눈은 반짝이게 빛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멜리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