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대성당 앞은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들로 북적였지만, 내 눈은 단 두 사람에게만 머물렀다. 크리스티앙과 키캐.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며 다가갔고 크리스티앙과 키캐도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란!"
"아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숨이 차오를 정도로 뛰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니 텅 비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채워지고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키캐, 무릎 괜찮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걱정스러운 내 물음에 키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왔지. 우리가 비록 끝까지 함께 걷진 못했지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왔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내가 이 사람들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함께 걷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혼자 산티아고에 도착한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는데 두 사람은 먼 길을 걸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들의 진심이 전해지면서 지금까지의 고된 여정과 외로움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란, 우리 사진 찍자." 크리스티앙이 카메라를 꺼내 들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산티아고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 후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를 받았다. 몇몇 순례자들은 긴 여정을 축하하며 산티아고 호텔에서 호화로운 밤을 보냈지만, 우리는 인포메이션센터에서 알려준 알베르게에서 소박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 나는 그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꺼내 들었다.
"키캐, 크리스티앙. 두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기념품 가게에서 산 2010년 산티아고 완주를 기념하는 커플배지 두 개를 내밀었다.
"아란, 왜 배지가 두 개야? 너는 왜 없어?" 크리스티앙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커플 배지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어."
내 대답에 크리스티앙은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고 키캐는 배지를 받고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아란, 우리도 선물을 준비했어."
두 사람이 내민 건 작은 물통과 산티아고 상징이 새겨진 우정 팔찌였다. 크리스티앙은 나를, 나는 키캐를, 키캐는 크리스티앙을. 우리는 서로의 손목에 차례로 팔찌를 채워주었다.
"이 팔찌는 행운팔찌야. 자연스럽게 끊어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잘 때도, 샤워할 때도 절대 빼면 안 돼. 알았지?" 크리스티앙은 신신당부하며 내 손목을 톡톡 쳤다.
같은 팔찌를 나란히 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든든한 기분이었다. 이 세상 어디라도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는 삼총사가 된 것만 같았다.
꼬르륵. 꼬르륵..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마치 돌림노래처럼 우리를 에워쌌다. 반가움에 들떠 있느라 허기조차 잊고 있었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배고파." 크리스티앙은 한국어로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러고 우리는 셋이 다시 손을 맞잡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길을 걷는 동안 하늘에서 가느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완주를 축하라도 하듯 축복처럼 촉촉한 비가 우리를 감쌌다. 옷자락이 젖고 신발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충분했다.
어디로 갈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중 크리스티앙이 갑자기 거리 한쪽의 바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늑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와인잔들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카운터 너머로 바텐더가 능숙한 손길로 모든 고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리아!"
크리스티앙이 반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바의 한쪽 테이블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돌아보았다. 폰세바돈에서 만난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님이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반가운 얼굴로 곧장 그들에게 달려가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 뒤에 서 있었다. 나의 어색한 모습을 본 크리스티앙이 웃으며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아란, 여기는 마리아네 가족이야." 그의 말에 마리아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앙과 마리아네 가족은 스페인어로 대화를 이어갔고 빠르게 쏟아지는 스페인어 대화 속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꼬레아, 치카, 산티아고, 팔라스데레이, 산티아고' 같은 몇 개의 단어뿐이었다.
그러다 마리아의 아버지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간단하게 내 소개를 했다.
"엔깐따다. 메야모 아란, 소이 꼬레아나."
서툰 발음으로 용기 내어 말한 내 소개에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눈빛은 웅변대회에 참가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 따뜻하고 다정했다.
"무이 비엔!(좋아!!)" 마리아의 아버지가 엄지를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그의 환대에 마음이 놓이는 순간 바텐더가 내 앞에 황금빛 시드라 한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마리아의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란, 빠라 띠, 빠라 띠."
그는 우리의 카미노를 축하하며 모두에게 시드라 한잔씩 술을 돌렸다. 찰랑대는 잔 속 황금빛 시드리나는 잔잔하게 흔들리며 촛불처럼 은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