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나

스페인 오빠들이 생기다

by 북극곰

"살룻" 우리는 잔을 부딪히며 외쳤다.

톡 쏘는 포도맛 시드라는 목을 간질이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마리아네 가족도, 크리스티앙도 모두 한껏 들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유독 키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키캐의 모습이 신경 쓰여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고 크리스티앙을 바라봤지만 크리스티앙은 여전히 마리아의 가족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조용히 키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캐, 무슨 일 있어?"

"아란, 나 배고파 죽겠어."

키캐는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캐의 목소리에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나도 같은 처지라 고개만 끄덕였다. 시드라를 곁들인 이곳은 한 잔 하기엔 딱 좋은 곳이었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에는 메뉴도, 분위기도 적합하지 않았다.


"요 탐비엔.(나도.)"

"아란, 네가 크리스티앙한테 빨리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하면 안 될까? 나 정말 배고파."


키캐의 간곡한 부탁에 비둘기가 되어 다시 크리스티앙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앙!"

"디메(말해)"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부에노(좋아.)"


크리스티앙의 대답과는 다르게 그의 수다는 쉽게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곧 갈게.' 하는 대답을 믿고 기다린 지 어느덧 십 분을 넘기자 키캐와 나의 배에서는 '꼬르륵'소리를 넘어 '우르릉 쾅쾅'하며 천둥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결국 크리스티앙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는 해가 저물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거리의 식당들마다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하나둘 북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한 식당에 들어갔다. 문어요리, 감자튀김, 샐러드, 스테이크, 와인까지 시켜 가득 찬 식탁을 바라보니 기쁨의 웃음이 절로 났다. 크리스티앙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살룻"


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서로를 축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미노 완주를 기념하는 자리,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빛나는 주인공 같았다.


"아란! 너는 이제 한국인이 아니야." 크리스티앙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는 하프 꼬레아나, 하프 발렌시아나야. 발렌시아 출신 오빠가 두 명이나 있으니까. 혹시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발렌시아나라고 대답해야 해."


그의 농담에 키캐도 웃음을 터뜨렸다. 따뜻한 음식과 와인, 그리고 유쾌한 농담까지 더해지자 마음이 한없이 풍족하게 느껴졌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새로 생긴 발렌시아 오빠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알베르게로 향했다. 골목길에는 우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리스티앙은 스페인 가곡을 흥얼거렸고 키캐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밤하늘은 별로 반짝 빛나고, 저 멀리 산티아고 대성당의 은은한 불빛이 우리의 길을 비춰주었다.


'하프 꼬레아나, 하프 발렌시아나."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된 하루의 여정으로 무거웠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행복이라는 게 아마 이런 게 아닐까.


골목길을 벗어나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800킬로미터에 달했던 길고 긴 여정.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날들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는 성취감이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걷지 못한다는 아쉬운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내일이면 더 이상 순례자의 일상이 아닌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오며 묘한 공허함이 나를 스쳤다.


"크리스티앙, 키캐. 이렇게 산티아고가 끝나니 너무 아쉬워."

"나도 그래,.. 뭐랄까 실감이 잘 안 나."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아쉬우니까.. 내일 피니스테라에 가는 건 어때? 카미노의 진짜 끝이라고도 하잖아."


키캐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좋아!"


keyword
이전 05화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