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죽음의 땅, 피니스테라를 가다

by 북극곰

"아란, 일어나."


오랜만에 듣는 키캐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깨웠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 목적지는 피니스테라. 라틴어로 '세상의 끝.(Finis Terrae)'을 뜻하는 이곳은 한 때 유럽 대륙의 서쪽 끝으로 여겨지며 '세상의 끝'이라 불리게 되었다.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서 그곳까지 걸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처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란, 준비 다 됐어? 바모노스!(출발)!"


키캐는 밝은 미소로 나를 재촉하며 웃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세수만 대충 하고 널브러져 있던 짐을 가방에 욱여넣은 뒤 어깨에 메었다. 우리는 산티아고 알베르게를 뒤로 한 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터미널 근처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카페 콘 레체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피니스테라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가족석으로 되어 있었고 가운데 테이블을 두고 마주 보며 앉을 수 있는 좌석이었다. 나는 키캐랑 함께 앉고 앞자리에는 프랑스에서 온 아주머니와 크리스티앙이 앉았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소이 발렌시아나. 발렌시아에서 왔어요." 전날 그들이 가르쳐준 '소이 발렌시아나'를 아주머니께 말하자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금 민망하여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소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한국에서는 어디에서 살아?" 아주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인천이요."


아주머니는 내 대답을 듣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주머니는 키캐와 크리스티앙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고 자꾸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한 채 키캐에게 물었다.


"뭐야? 왜 그러셔?"


"저 아주머니가 20년 전에 한국에서 두 아이를 입양했대. 그런데 둘 다 인천에서 태어났다고 하셔." 키캐가 눈을 반짝이며 아주머니의 말을 대신 전했다.


"아 그래서... "


아주머니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꼭 잡아드렸다.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를 통하여 세상은 참 넓으면서도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은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져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인연'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도.


크리스티앙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키캐는 창문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들었다. 나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버스는 세 시간을 달려 피니스테라에 도착했다. 산티아고보다 작은 해안마을 피니스테라. 우리는 숙소를 찾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던 중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그거 알아? 콜롬비아 사람들은 가방을 어깨 대신 이마로 메고 다녀."


크리스티앙은 말하며 가방을 이마에 얹었다. 그의 말에 키캐와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라 미라(이거 봐봐)."


"에이~ 거짓말하지 마. 말도 안 돼."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한번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크리스티앙은 모든 콜롬비아인들이 그렇게 가방을 메는 건 아니지만 몇몇 원주민들이 이마로 가방을 멘다고 억울해했다.


길었던 순례의 끝자락에서 만난 작은 일상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여유를 즐긴 후 우리는 알베르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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