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니스테라

사기 단소와 바다

by 북극곰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4인실 도미토리에 짐을 풀었다. 사장님께 빨래를 맡기고 나니 오랜만에 손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빨래를 맡기고 방 한쪽에 앉아 가방을 정리하다가 한국인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단소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단소를 꺼내 들자 옆에서 크리스티앙이 흘낏 내쪽을 보며 물었다.


"아란, 그게 뭐야?"

"한국 전통 악기야. '단소'라고 해. 몇 주 전에 만난 한국인 선생님이 선물로 주셨어." 손에 쥔 단소의 차가운 감촉이 살짝 따뜻해지는 듯했다.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가 떠오르며 순간 코 끝이 찡했다.


"그럼 연주도 할 줄 알아?"


크리스티앙의 하늘색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 눈길을 외면할 수 없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단소를 입술에 댔다. 초등학교 4학년 음악시간에 낑낑대며 '아리랑'을 연습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 스탠드에서 나머지 연습까지 했던 기억도. '아리랑'을 제대로 불기 전까지 몇 날 며칠을 붙들고 연습을 했던 날들.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손이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 회색 플라스틱 단소를 조심스레 아랫입술에 댔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음을 내보냈다. 처음에는 불안정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곧 익숙한 멜로디로 이어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단소의 맑고 깊은 울림소리가 방 안 가득 번졌다. 아리랑의 멜로디는 내 숨과 입술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빡세게 나머지 공부를 했던 탓에 손과 머리가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에이~ 별거 아니네. 나도 해볼래!"

크리스티앙이 단소를 들고 덥석 집어 들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아랫입술에 단소를 댔지만 그가 낸 소리는 단지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쉬이~'하는 소리뿐이었다. 키캐는 이를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어라 이상하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크리스티앙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단소를 입에 가져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웃음을 참고 단소를 불 때의 입 모양을 보여주며 조언했다.


"입술을 양 옆으로 펴고 '으' 소리를 내봐. 이렇게."

내가 입모양을 시범 보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기세로 단소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가방 정리에 다시 몰두했다. 몇 분 뒤, 크리스티앙이 환한 미소를 띠며 다급히 나를 불렀다.


"아란, 미라 미라."


고개를 돌리자 그는 보란 듯이 단소를 입에 갖다 댔다. 하지만 기대했던 청아한 소리는커녕 엉뚱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보니, 그는 단소를 연주하는 척하며 손가락은 엉뚱한 곳을 짚고, 음은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크리스티앙!"


내가 소리치자 키 캐는 다시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 크리스티앙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윙크를 날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런 유쾌한 시간이 또 올까 싶어 그들의 모습과 웃음소리를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 뒤, 우리는 작은 어촌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피니스테라는 마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해안과 황홀한 노을, 그리고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덕분에 평화로운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니 'Lonja(론하)'라는 이름이 붙은 어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갓 항구에 닿은 배에서 어부들이 싱싱한 해산물과 생선을 바삐 내리고 있었다. 그 활기 넘치는 풍경은 그 자체로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한 번 들어가 볼까?" 키캐가 흥미로운 듯 손짓하며 말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어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장은 더욱 생동감이 넘쳤다. 소금기 어린 공기와 어부들의 웃음소리, 거래를 흥정하는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북적였다.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커다란 이름 모를 생선들과 해산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무거운 통발을 내려놓는 어부의 땀방울까지 고스란히 보였다. 시장의 모습은 마치 활기찬 삶의 흔적들이 모여 있는 듯했다. 그때, 한 어부가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데 돈데 에레스?(어디에서 왔어요?)"


우리는 잠시 멈춰서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이 꼬레아나 이 발렌시아나."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이라… 그곳도 바다와 많은 고기들이 있죠?"

"맞아요. 제가 사는 곳도 항구도시라 바다를 쉽게 볼 수 있어요. 물론, 신선한 생선도 자주 먹고요."


나는 잠시 인천 연안부두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부는 우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에게는 바다가 전부입니다. 어제의 바다, 오늘의 바다, 내일의 바다는 항상 다르죠, 꼭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우리 인생과 닮지 않았나요? 내일은 어디로 갈지 모르니 오늘 충실히 살아야죠."


그의 말에 잠시 고요함이 흐른 뒤, 바다와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과 노란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있는 투박한 두 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마치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고, 느끼며 살아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시장을 빠져나와 벤치에 앉았다.


"키캐, 바다가 저렇게 깊고 넓다면,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내가 물었다.


"그렇지. 바다처럼 사람의 인생도 끊임없이 변하는 게 아닐까? 어떤 날은 잔잔하고, 어떤 날은 거친 파도가 일기도 하고. 그런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거고." 키캐가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리를 향해 두 사람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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