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두 사람이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이 순례 초반 함께 걸었던 장까를로와 글로리아라는 걸 알아차렸다. 장까를로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글로리아도 반가운 얼굴로 차례차례 인사를 건넸다.
"장까를로! 글로리아!! 진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우리는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장까를로와 글로리아는 로쵸와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고 했다. 하지만 로쵸는 산티아고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어제 피니스테라에 도착했다고 덧붙였다. 멀리서 산책을 하다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달려왔다며 활짝 웃었다. 길가에 서서 우리는 재회를 기뻐하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장까를로가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이제 어디로 갈 계획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키캐와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우리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글로리아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피니스테라 일몰을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녀의 제안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석양을 보기 위해 등대가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800킬로미터를 걸어온 나에게 3킬로미터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덕을 오르다 보니 예상보다 가파른 길이 이어졌고, 내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키캐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아 부축했다.
"키캐, 카미노가 또 시작된 것 같지 않아?"
내가 장난스레 투덜거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란, 드링크 워터! 조금만 더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조금만 힘내자. 아니모(Animo! Animo!!) "
그의 말에 힘을 얻어 우리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피니스테라 등대(Faro de Finisterre)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는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순례길의 끝이 드러났다. 해가 지기 전인데도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등대를 지나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해가 저물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순간을 즐기고 있는 순례자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전신주에 옷을 걸어두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순례를 마친 이들이 입었던 옷이나 신발을 태우며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상징적인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화재 위험 때문에 그런 행위가 금지되어 순례자들은 울타리나 전신주에 옷을 걸어두며 순례의 끝을 기념하고 있었다.
또 다른 순례자는 배낭을 베개 삼아 바다를 등지고 누워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순례자의 뒷모습에서는 긴 여정 끝에 닿은 평온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산티아고가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만약, 인생에서 노란 화살표나 조개껍질 같은 이정표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차가운 대서양 바람이 두 뺨을 스쳤고 멀리 수평선 위로 노을빛이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아란, 무슨 생각해?" 크리스티앙이 물었다.
"그냥.. 산티아고가 끝났다는 생각?"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 산티아고 길은 끝났지만 우리 삶은 끝난 게 아니잖아."
"그래서 무서워."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크리스티앙, 내가 노란 화살표나 조가ㅣ개껍질 없이 내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크리스티앙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란, 넌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씩씩하고 용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야. 만약 네가 너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너를 대신 믿어줄게. 너라면 당연히 잘 해낼 거야."
그의 하늘색 눈동자 속에서 진심이 비쳤다.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옅은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장까를로가 가방에서 와인 한 병과 컵을 꺼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산티아고 완주를 축하하자고!"
그는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컵을 건넸다.
"친친"
"살룻"
"건배"
각국의 언어로 잔을 부딪히며 축배를 들었다. 와인의 진한 향이 입안에 퍼지자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키캐가 '풉'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란, 해가 다 지고 있는데 왜 선셋을 등지고 있는거야?" 키캐가 물었다.
"아, 나한테는 선셋보다 이 와인이 더 중요해." 내 대답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크리스티앙도 한참 웃다가 본인의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구름 낀 하늘이 살짝 아쉬웠지만, 멀리서 서서히 붉어지는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장까를로가 내 컵에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아란, 산티아고가 끝났으니 어디로 갈 생각이야?"
"잘 모르겠어. 똑같은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은데 새로 시작하는 게 두렵기도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말에 옆에서 듣던 있던 글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란, 산티아고 길에서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을 잃을 걱정이 없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화살표 찾는 것도 쉽지 않았었지. 기억나? 우리 반대로 걸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 다시 찾아서 여기까지 왔잖아.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꿈을 찾는 게 쉽지 않고,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네가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꿈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네가 가는 그 길이 곧 네 길이 될 테니까."
그녀의 말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저 멀리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죽음의 땅 피니스테라의 일몰과 함께 내 산티아고 여정도 끝을 맺었다.
등대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0km 이정표가 새겨진 비석을 발견했다.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을 상징하는 그 비석을 마주하는 순간 '아 정말 끝이구나.'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쉬운 마음과 함께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키캐와 크리스티앙은 고단했는지 깊은 잠이 들었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스쳤다. 이 길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