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禧年, Holy Year)

순례자 미사

by 북극곰

2010년은 성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희년(禧年, Holy Year)'이었다. 교황의 칙령에 따라 '순례의 해'로 선포된 이 해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성문을 1년 내내 활짝 열려 있었고 이 문을 통과한 이들은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전대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특별한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흙먼지로 얼룩진 옷과 닳고 해진 신발을 신은 이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엿보였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감동이 서려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이틀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산티아고를 향해 걷던 마지막 여정. 한 달 동안 온 마음을 다해 걸어왔던 길 끝에서 느꼈던 벅찬 감정이 다시금 내 가슴을 울려 퍼졌다.


좁은 골목을 지나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 들어서자 눈앞에 웅장한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순례를 마치고 도착한 이들은 서로 껴안고 웃음과 눈물로 기쁨을 나누었고, 갈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아름다운 꿈속 한 장면 같이 느껴졌다.


며칠 전 크리스티앙과 키캐와의 재회의 기쁨으로 정신없이 지나쳤던 대성당이 이제 온전히 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성당 앞에 서자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웅장한 성당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세월이 새겨진 외벽은 성야고보의 오래된 비밀을 품고 있는 듯 무언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당 중앙의 파사드에는 지팡이를 든 채 모자를 쓴 순례자의 모습으로 성야고보고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마치 이곳까지 걸어온 이들을 내려다보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아란, 올해는 '성 야고보의 해'라는 거 알고 있지?" 크리스티앙이 나지막이 말했다. 키캐와 나는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고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성스러운 문(Porta Santa)으로 성당에 들어가자. 성야고보의 해에 그 문을 지나 성당을 들어가 참회하면 모든 죄의 벌을 면제받을 수 있대."


그의 제안에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퀸타나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청동으로 된 커다란 문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문 위에는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조개껍질과, 콤포스텔라를 의미하는 별이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성야고보와 그의 제자들이 조각된 모습이 보였다. 투박하면서도 웅장한 이 문에서는 따뜻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여기가 바로 포르타 산타, 성문이야." 크리스티앙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을 지나면 정말 모든 죄가 사해지는 거야?" 내가 거대한 청동문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지. 그래서 희년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는 거야." 옆에 있던 키캐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지만 희년에는 이 문이 매일 열려있어. 올해가 바로 그 희년이고. 우리는 이 문을 지나면 은총을 받을 수 있어." 크리스티앙이 덧붙였다.


나는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천천히 문 앞에 다가섰다. 손끝으로 차가운 청동문의 감촉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속으로 기도를 올린 뒤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다.


"이 문을 넘어 성당에 들어서면 과거의 잘못도, 아팠던 기억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엔 묘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성당 내부의 웅장함이 마치 숨이 멎는 듯한 웅장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늘로 높이 뻗은 천장과 그 사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돌기둥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스며드는 빛이 성당을 고요하고도 신비로운 빛으로 물들였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잊고 장엄한 풍경에 압도되었다. 조용히 성당을 둘러본 뒤,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 앞에 나란히 섰다. 미사는 스페인어로 진행되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경건하고 거룩한 분위기에 평온함이 느껴졌다.


너무 평온해서였을까?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 즈음 성당 제단 앞에 놓인 커다란 금속 향로, 보타푸메이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보타푸메이로'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상징적인 존재로 과거에는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례자 미사 때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깊은 상징성을 지닌 의식으로 남아있었다.


여덟 명의 성당직원이 밧줄을 잡고 거대한 향로를 흔들자, 아치를 그리며 좌우로 흔들렸다. 처음 마주한 그 장면을 마주한 나는 숨이 멎을 듯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은 단순한 의식을 넘어, 우리가 걸어온 긴 여정의 마지막을 하늘이 축복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아란, 굉장하지?" 옆에서 있던 크리스티앙이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다 씻겨 나가는 기분이야."


그 말은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아프게 남아있던 기억들이 모두 씻겨 나가는 듯한 느낌. 그때, 보타푸메이로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며 성당 안에 퍼진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나는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마음속으로 그 장면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향로의식도, 미사도 끝이 나고, 순례자들이 대성당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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