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발걸음

길의 끝에서, 이별의 시작

by 북극곰

화려한 저녁 만찬을 마친 뒤, 크리스티앙과 키캐와 함께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도착하자 두 사람은 발렌시아행 기차와 버스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로비에 남았고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에서 그들에게 쓴 편지를 꺼내 그들의 침대 위에 살짝 올려두고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기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자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야지. 아란!"


키캐의 목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고 키캐와 크리스티앙 쪽으로 고개를 돌리 두 사람은 짐을 챙기고 있었다.


"아란, 부에노스 띠아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들어 밝게 웃었다. 나는 하품을 참으며 무심한 척 대꾸했다.



"부에노스 띠아스, 치코스!! 두 사람 오늘 발렌시아로 떠나는 거야?"


"응.. 밤 10시 기차야."


키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늘 웃음 가득했던 크리스티앙도 잠시 미소를 거두었고 그의 하늘색 눈빛 속에는 헤어짐에 대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떠나는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알베르게에 배낭을 맡기고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늘 그렇듯이 나는 카페콘레체,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에스프레소와 크로와상을 주문했다. 잔잔한 대화와 함께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키캐의 전화벨이 울렸다.


"띠링~띠링"


키캐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크리스티앙에게 스페인어로 다급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 단어를 유추하려 애썼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키캐, 무슨 일이야?" 조심스럽게 묻자, 키캐가 깊은숨을 내쉬며 답했다.


"우리가 어제 예약했던 기차가 제대로 예약되지 않았대. 그래서 다시 발렌시아에 버스와 기차를 찾아야 해."


키캐는 화가 났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크리스티앙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애써 외면하는 듯 보였다.


"게다가 크리스티앙은 비행기를 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기차나 버스, 아니면 렌터카밖에 방법이 없는데 기차는 이미 매진이라 물 건너갔고 지금 다시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야."


나는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걱정이 앞선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는 그들이 나와 하루 더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두 사람의 일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크리스티앙은 여유롭게 웃으며 "오늘 아니면 내일 가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키캐는 그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발렌시아행 교통편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차와 버스가 모두 매진이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산티아고공항에서 마드리드까지 렌터카를 타고 이동한 뒤, 마드리드에서 발랜시아행 기차를 타기로 계획을 바꿨다.


키캐가 렌터카를 예약하는 동안, 크리스티앙은 글로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스페인어로 얘기를 나더니 내게 전화기를 건넸다.


"올라. 글로리아."

"아란, 우리 오늘 12시에 대성당에 갈 건데 우리 대성당 앞에서 만날까?"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출발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저녁에나 헤어질 줄 알았던 나는 예상보다 빠른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크리스티앙은 마치 결혼식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의 손을 넘겨주듯, 나를 글로리아에게 맡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녀와 약속을 정하면서 문득 눈물이 차올랐다. 두 사람과의 작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일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본 키캐가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란, 너는 성야고보상을 세 번 안아야 해. 알았지?"


키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갈까?" 크리스티앙은 울고 있는 나와 키캐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비워진 커피잔을 뒤로한 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고 어깨에 멨고 나는 여전히 흐느끼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걸음이라는 걸 예상했는지 마음 한구석이 시린 울음으로 가득했다. 걷는 내내 눈앞이 흐려지고 발걸음이 느려지자 두 사람은 내 걸음에 속도를 맞춰 주었다.


"아란, 왜 울어?"

"우린 늘 세 명이서 같이 가방을 메고 같은 길을 걸었었잖아. 근데 지금 두 사람은 가방이 있고 나는 가방이 없는 게 너무 슬프고 이상해."


나는 울먹거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크리스티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와유, 아유 해피?"

"노, 아임 새드"


걷다 보니 어느새 산티아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팔라스데레이에서는 내가 그들을 두고 갔는데 이제 그들이 나를 두고 떠나야 할 차례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차가운 겨울비처럼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마음을 짓누르는 이별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란, 너는 이제 두 명의 스페인 오빠가 생긴 거야. 넌 발렌시아 오렌지 농장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너는 우리를 금방 잊어버릴 거야. 그렇지 않니?"


키캐는 장난스러운 말로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우슴에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듯, 않기 위하여 먼발치에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산티아고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가 정류자에 들어섰다. 승객들이 차례로 짐을 실었고 키캐와 크리스티앙이 마지막으로 짐을 올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진짜 이별을 해야 했다. 크리스티앙이 나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면 가지 말라고 붙잡을 것 같아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땡큐 소 머치"


그 짧은 한마디는 진심이 남겨 있었다. 마치 차가운 빙하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내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흔을 넘긴 다른 국적의 사람이 함께 걸어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그와의 시간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는 나를 끌어안더니 그동안 꾹 눌러두었던 감정을 폭발시키듯 나처럼 꺼이꺼이 울기시작했다. 그의 특별한 하늘색 눈에서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돌려주었던 염주를 다시 내 팔목에 채워주었다.


"아란, 우리 꼭 발렌시아에서 만나자."


키캐와 크리스티앙, 우리 세 사람은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이 내게 했던 것처럼 손을 흔들며 끝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팔라스데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버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눈물은 멈추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내가 걸어온 길과 그들을 떠올렸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산티아고까지. 또 그들과 함께 걸었던 소중한 시간과 추억들.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내 삶에 깊이 스며든 기억들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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