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Adios, 이제 안녕

by 북극곰

미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자, 어디선가 순례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고 가벼웠다. 아마도 미사 내내 옆에 있어준 크리스티앙과 키캐 덕분이었으리라. 우리는 한동안 성당 앞에 서서 향로 의식이 남긴 여운을 곱씹다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란!"

성당을 빠져나와 광장을 지나려던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례길 위에서 몇 번 마주쳤던 아일랜드 출신 부녀 피터와 나타샤 그리고 글로리아였다. 오랜만에 만난 피터가 나를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란,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언제 도착했어?"

"피터, 저는 26일에 도착했어요. 어제 피니스테라에 갔다가 오늘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왔어요."

"아, 그렇구나!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다."


나는 크리스티앙과 키캐를 피터에게 소개하며 웃었다.


"아, 여기는 제 친구 크리스티앙이랑 키캐예요. 같이 산티아고를 마쳤어요."


두 사람은 웃으며 피터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크리스티앙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란, 우리 은행에 좀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터와 테라스 한쪽에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피터는 나를 위해 맥주를 한잔 사주며 물었다.


"아란 그동안 어땠어? 걸으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다리에 쥐가 오른 적도 있고, 동네 양아치들에게 희롱당한 적도 있었고, 발등이 부어서 병원에 간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 순간들마저 특별했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성취감도 컸으니까요..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사실 산티아고가 목적이긴 했지만 저는 길 위에서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길이 끝나고 나니 너무 아쉬워요."


피터는 조용히 끄덕이며 내 말을 곱씹는 듯했다. 그러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처음엔 산티아고에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길을 걷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스쳐가는 풍경들,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중반쯤 지나 깨닫게 되었어.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삶은 결국 지금이고, 지금이 곧 삶이니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데 있는 거니까."


피터의 말은 마치 내 마음 깊은 곳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나 역시 길을 걸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만족감과 성취감 뒤에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아쉬움처럼 밀려왔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은행에서 돌아왔다. 두 사람이 오자마자 글로리아가 웃으며 우리를 향해 말했다.


"얘들아, 저녁 먹었어? 우리랑 같이 저녁 먹자."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너만 좋다면 우리는 아무래도 좋아." 크리스티앙은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피터와 글로리아를 포함해 총 열두 명. 이렇게 많은 사람을 받아줄 레스토랑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빈 테이블이 없다는 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글로리아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앞서 가던 중 문득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친구들이 옆에 있었지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그들의 모습을 기다렸고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안도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크리스티앙, 키캐! 혹시 저 사람들이랑 밥 먹는 게 불편해?"


크리스티앙은 슬쩍 미소 지었고 키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열두 명이 들어갈 식당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그래도 네 친구가 우리 친구니 네가 좋다면 우린 함께 갈 거야." 나를 배려해 주는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정말."


그때 글로리아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저쪽에 자리가 있대."


발걸음을 재촉해 그녀가 안내한 곳은 좁지만 따뜻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직원이 서둘러 식탁을 붙여 열두 명이 앉을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우리는 메뉴를 골랐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고 크리스티앙과 키캐도 조금씩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하얀 식탁보 위로 음식이 하나둘씩 올려지고 와인잔이 부딪히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며 우리들의 마지막 저녁을 기록했다. 나는 카메라 렌즈 대신 눈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오는 이별 때문인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이 밤이 지나면 크리스티앙의 '하와유, 아란?'도, 키캐의 '아란, 드링크 워터.'도 더는 들을 수 없겠지. 이탈리아 해군 출신 장까를로의 '차오'도 이제는 굿바이. 때로는 언니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함께 걷고 웃던 글로리아도 이제는 아디오스.


내 눈물이 멈추지 않자 글로리아가 마시던 와인잔을 서둘러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나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아란, 무슨 일이야?"

"나다, 나다."

"괜찮아, 울고 싶은 만큼 울어." 글로리아는 등을 토닥이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이들과 헤어진다는 게 슬펐고, 함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에 너무 감사했다. 험난했을지도 모를 긴 여정 속에서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에 이별이 더더욱 가슴 아픈 건지도 몰랐다. 우리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했다.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이제 모두 안녕.


그렇게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더없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의 미소, 손짓,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이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도 이 기억은 오래도록 내 마음 한편에 머무르며 내게 힘을 줄 것이다. 피터가 일어나 와인잔을 들고 마지막 건배를 외쳤다.


"Salud! 다시 만날 날을 위해!”


모두 환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와인의 붉은빛이 촛불에 반사되어 반짝였고,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멈춘 듯했다. 이 밤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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