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끝에서

굿바이, 피니스테라.

by 북극곰

아마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이 되자 조용히 알베르게를 나와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고요한 바다를 따라 걷다 보니 모래 위에 산티아고의 상징인 조개껍데기가 눈에 띄었다. 나는 작은 조개껍데기 두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들고 로비로 나왔다. 작은 조개껍데기 하나를 손에 들고 '키캐&피니스테라'라고 적고, 다른 하나에는 '크리스티앙&피니스테라' 새기며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조개껍데기를 살며시 주머니에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란, 어디 갔다 왔어?" 크리스티앙이 살짝 부스스한 머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뒤이어 키캐도 몸을 일으키며 하품을 했다.


"그냥.. 바다 구경하고 왔어."

"그랬구나. 우리도 일찍 일어나서 같이 갈걸."

"우리 오늘 몇 시 버스지??"

"10시야. 빨리 준비하고 우리 나가야 해."


키캐의 대답을 듣고 나는 서둘러 샤워를 히고 가방 속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한달동안 나와 함께했던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 동안 나와 함께 걸었던 닳아빠진 운동화와 찢어진 페이지가 군데군데 보이는 산티아고 책을 꺼내 쓰레기통에 넣었다. 오래된 신발의 무게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럽게 쓰레기통 안으로 뻗어 들어왔다.


"아란, 이 책 가져도 될까?"

고개를 돌리니 크리스티앙이 책을 들고 서 있었다.

"이걸?"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응. 한국인 순례자와 함께 걸었다는 추억의 징표로 남기고 싶어."


그의 하늘색 눈이 반짝였다. 이 낡고 빛바랜 책을 그저 책이 아닌 나와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한 그의 말은 스페인 여름 햇살만큼이나 따뜻했다.


"크리스티앙. 근데 이 책 중간에 찢어진 부분도 있고 낙서도 많은데 괜찮아?"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하지!! 고마워! 그런데 하나 부탁이 있어.." 책을 손에 쥔 채 그는 망설이며 말했다.

"뭔데?"

"여기에 한국어로 편지 써주면 안 돼?"그는 책의 안쪽 면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펜을 꺼내 책 안쪽 여백에 두 사람을 향한 메시지를 옮겨 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펜을 움직이며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짧은 메시지를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은 뒤 그에게 책을 건네자 크리스티앙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란, 키캐랑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영어로 읽어줘."


그는 책을 나에게 다시 건넸다.


크리스티앙 &키캐에게

2010년 뜨거운 여름을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두 사람 덕분에 산티아고는 순례가 아니라 즐거운 여행이 되었어. 두 사람이 베풀어준 사랑과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발렌시아에서 다시 만나.

-아란-


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책과 바닷가에서 주운 조개껍질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크리스티앙과 키캐는 환하게 웃으며 조개껍질을 받아 들었다. 키캐는 손끝으로 조개껍질을 천천히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란, 이건 무슨 뜻이야?"

그는 조개껍질에 한글 이름과 '피니스테라'라는 글씨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적힌 건 두 사람의 이름이야. 이건 키캐, 이건 크리스티앙, 그리고 이건 '피니스테라'. 영어 스펠링을 몰라서 한글로 적었어."

내 설명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조개껍질을 바라보더니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 넣었다.


"VAMOS(가자!)"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 바닷가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배경으로 우리는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의 환한 미소를 보며 나도 함께 웃었지만, 그 웃음 뒤로 밀려드는 아릿한 슬픔을 감출 수는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했던 우리가 함께한 여정은 오래된 친구와의 추억처럼 익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를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키캐와 크리스티앙의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위안이 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 그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 서로의 끝에서 만난 정들었던 우리를 놓아줘야 한다. 만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스며들 수 있었을까?


'내가 이 두 사람 없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해변을 스치는 바람을 핑계 삼아 고개를 돌렸지만 눈가에 차오르는 감정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아란, 왓 해픈? 괜찮아??" 키캐가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클라로! 아쎄 프리오. 당연하지! 바람이 좀 차네." 나는 에먼 바람을 탓하며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크리스티앙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란, 투모로우.. 위 윌 미스 유."


그 한마디가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무너뜨렸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다 크리스티앙이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란, 낫 투데이. 투모로우 유 크라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채로 우리는 산티아고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피니스테라의 풍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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