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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발렌시아

에필로그

by 북극곰

2010년 8월, 두 친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껌이 에너지라며 건네주고, 비스킷도주며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다.


크리스티앙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다가 내가 신발을 벗고 발바닥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폰세바돈 알베르게 문 열리기 기다리다가 글로리아와 펠레그리뇨들에게 마사지해주자 본인도 해달라고 조르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발등에 부기 빼려고 찬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 그는 어느새 세숫대야를 가져와 내 옆에 놓고 함께 발을 담갔다. 메일주소 교환하고 사진 찍고 장난치다가 우리는 친해졌다.


점심을 함께하자는 제안은 안토니오와의 약속 때문에 거절했지만 저녁은 달랐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한 재료로 저녁을 만들어 나누어 만들어 먹는 자리였다. 조금 어색해서 다른데 앉으려고 하니까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하는 크리스티앙. 아침식사를 하며 그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일부터 같이 걷지 않을래?"


나는 발 상태가 좋지 않아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했고, 숙소에서 만나자고 답했다. 대신 아침에 나를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키캐가 나를 깨워줬고 크리스티앙 옆자리에서 아침을 먹게 되었다.

이미 마음은 열린 상태였지만 두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 걱정되었다. 국적, 성별, 나이, 언어...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가까워졌다가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를 받을까 봐 괜스레 겁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키캐와 크리스티앙은 이것 저 것 오빠처럼 잘 챙겨줘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들이 알베르게에 언제 도착하나 기다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점점 더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갔고, 결국 우리는 같이 걷게 되었다.


두 사람과 함께 걸었던 첫날, 키캐와 크리스티앙이 사소한 말다툼을 했을 때 '내일부터는 힘들더라도 혼자 걸어야겠다.'라고 결심했지만 함께 걸으며 서로 의지하고 함께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건 순례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팔라스레데이에서 처음으로 헤어질 때, 두 사람과 나는 셋이서 엄청 울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했다. 크리스티앙은 내가 그들과 산티아고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랐고, 울면서 서툰 영어로 'STAY, STAY'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는 내가 왜 자신들과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티아고에서의 재회.원래 계획대로라면 내가 도착한 다음날인 27일에 도착하는 게 맞는데, 두 사람은 무리해서 40km를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더 이상 그들은 '외국인'도, '게이'도 아니었다. 그저 또 하나의 피부색이 다른 가족 같은 존재였다.


또 한 번의 이별. 헤어짐이 이미 예견되어있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참 많이 울었다. 특히 두 사람이 발렌시아로 돌아가는 날, 키캐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고, 크리스티앙은 상점 앞에 주저앉아 우는 나를 보며 다가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걸어줘서 정말 고마워"


울먹이는 그의 한마디에 우리는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산티아고 걸으며 두 개의 별을 만났다고 했다. 하나는 하늘에 늘 밝게 떠있는 별,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고. 감동이었다.


"Today I have cleane my heart because the tears of my friend Aran.

I'm very, very, very happy. Thank you for all this happiness. Valencia is waiting for you... Tic, tac, tic, tac!!!!! "


2010년 10월, 다시 그들과 재회했을 때 나는 걱정했다. 함께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나 혼자만의 것이었을까 봐.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백번을 돌이켜봐도 신기했다. 이 사실을 주 사람에게 말하곤 할때면 크리스티앙은 늘 중요한 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외적인 것도 내적인 것도 예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주었고 나를 두 사람의 삶에 초대해 주었다.


난 참 못됐지..

산티아고에서 함께 맞춘 우정 팔찌를 혼자만 차고 있으면 이상할까 봐 가방에 넣어두고 키캐의 손목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찼다. 묶여있는 방식이 다른 걸 크리스티앙이 보고 한 번이라도 뺀 적이 있냐고 물었다. 샤워할 때만 뺀다고 했더니, 절대 절대 빼지 말라고 한다. 팔찌가 이게 끊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행운이 온다고. 그리고 산티아고에서 나에게 건넨 염주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다시 돌려받았다.


"아란, 돌려주지 말고 내가 에너지를 주고 싶은 사람한테 줘."


두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면서 한없이 나는 초라해졌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을 때에는 우리가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연히 느껴졌다. 만지면 쉽게 깨지는 유리알처럼 우리의 우정은 언젠가 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문지에 꽁꽁 싸서 깨지지 않게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과 함께 했던 발렌시아여행, 두 번 다시없을지도 모를 너무나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기에 더 슬펐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정말 큰 축복이고 행운이다. 계속 보고 싶고 계속 눈물 나고.. 마음이 너무 아프고 슬프다.

후유증이 오래갈 것 같다.


"Thanks for your visit. We feel very fortunate. Your happiness the greatest gift. Thanks."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몇 번의 새로운 만남을 하고, 몇 번의 이별을 했는지. 슬프지만, 가슴이 아프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들은 알까?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주었는지. 좋은 것들을 보지 않아도,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아도, 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간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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