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도 따고, 빠에야도 먹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해가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내려갈수록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하며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알부페라'에서 추억을 남기기로 했다. 알부페라는 발렌시아 도심 외곽에 자리한 곳으로 스페인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손꼽힌다. 우리는 운 좋게도 일몰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죽음의 땅 '피니스테라' 에서처럼 나란히 호숫가에 서서 해가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발렌시아 오렌지를 닮은 황금빛 노을이 호수 위로 펼쳐지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란, 발렌시아 여행 어땠어?" 키캐가 먼저 입을 뗐다.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어. 두 사람이 살고 있는 발렌시아는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거든.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 항공권을 예약할 때부터 두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어. 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했던 3박 4일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충분히 특별했는데, 덕분에 멋진 풍경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며 잊지 못할 추억까지 쌓을 수 있었어. 핼러윈 빵을 만들었던 시간도, 오렌지 나무 사이를 거닐며 오렌지를 직접 따던 순간은 여행 중 최고의 순간이었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
"그리고?"
"이 모든 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만큼 미안하고 고마워. 마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그 이자가 자꾸 늘어나는 기분이야."
"에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섭섭하지. 너는 발렌시아나잖아. 고향에 오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빚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우리도 네가 여기에 와서 정말 행복했어. 네 행복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혹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클라로, 디메.(당연하지. 말해)"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조금 있는데... 나.. 마마한테 작별 인사하고 싶어."
"마마?"
크리스티앙과 키캐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응. 베이커리 마마."
그러자 크리스티앙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키캐 엄마가 베이커리 마마면 우리 어머니는 오렌지마마인가?"
우리는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발렌시아 박물관이나 알부페라의 노을보다 더 멋진 키캐의 부모님이 있는 빵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빵집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붉게 물들던 하늘은 어느새 검게 변하며 어둠이 내려앉았고, 내 마음도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어... 닫혔네.." 나는 실망한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닥에 떨구었다. 키캐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아란, 엄마가 2층에 계시대. 올라가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직접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2층으로 올라가니 키캐의 부모님은 현관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키캐를 통해 인사를 전할 수도 있었지만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깊은 정이 들어버린 그들과 직접 작별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영어를, 나는 스페인어를 잘 못해서 가족오락관 퀴즈처럼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말을 반쯤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며 작별을 말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비록 그녀의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진심을 온전히 느끼며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니 나처럼 그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이 내 눈물을 말없이 닦아주었다. 피부색도, 국적도, 언어도 다 다른데 말이 아닌 마음으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디오스 노!, 아스따 루에고.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또 만나자.)"
그녀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나를 한번 와락 안아주었다. 키캐의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만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아일랜드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공항에 도착해 보딩을 마친 후, 나는 피부색이 다른 가족, 키캐와 크리스티앙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했다.
"아란, 행복해?" 키캐가 물었다.
"응, 행복한데 너무 슬퍼."
키캐는 울지 말라며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고 다독였지만 나는 눈물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키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크리스티앙과 포옹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고, 고맙고, 고마워."
"콘 구스또, 콘 구스또, 콘 구스또.(오히려 기쁨입니다.) 아란, 이건 이별이 아니야. 잠깐 헤어지는 거지. 우린 또 만날 거야. 날 믿어."
나는 크리스티앙의 따뜻한 품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그의 하늘색 눈동자를 바라보니 그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라 흐르고 있었다. 키캐는 그런 우리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키캐도 헤어짐이 슬퍼 마음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발렌시아의 밤하늘이 저 아래서 점점 멀어졌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일수록 도시의 불빛은 사라지고 검은 하늘만이 펼쳐졌다. 가슴 한 편이 뻥 뚫린 듯 텅 빈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 공허한 빈자리는 애써 삼키려던 눈물로 천천히 채워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많은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갈때마다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지만 현실은 그 약속만큼 따뜻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는 것을. 다시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었기에 이번 별은 그저 슬픔을 넘어선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키캐와 크리스티앙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이별이 아니야. 우리는 또 만날 거야.'
그 말을 되뇌며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속의 아픔을 다독였다.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