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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정 Jan 16. 2022

식량을 무기로 한 악마들인가?

시인함인(矢人函人)

맹자 공손추 상(上)의 유명한 구절 시인함인(矢人函人)에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孟子曰 矢人 豈不仁於函人哉 矢人 惟恐不傷人 函人 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맹자왈,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인하지 못하겠는가만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다만 사람을 상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다만 사람이 상할까 두려워하며, 무당과 관을 만드는 사람도 또한 그러하니, 그러므로 직업의 선택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ABCD(ADM, Bunge, Cargill, Louis Dreyfus의 네 글자를 딴)로 대표되는 식량 메이저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곡물 트레이더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이미지는 마치 화살이나 관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곡물 트레이더는 시인(矢人, 화살 만드는 사람)과 함인(函人, 갑옷 만드는 사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일 뿐 오직 사람들이 굶주리고 상하기를 바라는 존재들이 아니다. 트레이더가 이를 넘나드는 이유는 오직 자신들의 존재 목적인 이윤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트레이더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따라 이익(利) 대신 어진(仁)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까지는 못되지만, 적어도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규칙 안에서 화살도 만들고 관도 만들며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식량 메이저와 곡물 트레이더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부정적인 인상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첫째 원유, 철광석, 구리, 석탄 등과는 구별되는 식량이라는 상품이 인간에게 갖는 특수한 의미 그리고 둘째 식량을 포함한 원자재 트레이딩 시장 전반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와 일정 부분 무지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필수 생존 조건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먹는다는 것이 꼭 입으로 무언가를 삼키고 소화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정한 주기로 영양을 공급받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이처럼 매일매일 눈으로 보고 입으로 삼키는 생존에 직결되는 식량을 사고팔아 이윤을 추구하는 일에 사람들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실제로 현대사회에서는 원유(에너지)나 철광석 등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도 나의 몸으로 직접 소비하지 않음에서 형성되는 거리감이 이들 시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덜 관심이 가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대부분의 인류는 농경사회를 거침으로써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직접 소비한다는 경험이 의식 깊숙이 박혀있지만 비교적 현대에 그 쓰임이 생겨난 원자재들은 애초부터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발전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러한 차이가 식량교역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잣대가 요구되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둘째, 곡물 트레이더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 부분 원자재 트레이더 전반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이 중 상당 부분은 Glencore의 전신 Marc Rich + Co. AG 창업주 마크 리치를 다룬 <<King of Oil>>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스캔들에 뿌리는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들의 가장 많은 관심과 질타를 받은 것은 마크 리치와 그의 회사였으나, 그 외에도 Vitol, Philipp Brothers, Noble, Trafigura, Cargill, Transworld Oil 같은 원자재 트레이딩 업계의 거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사업들은 일반 대중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제로 사실인 이야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트레이더는 변화와 기회에 민감하다. 그리고 변화와 기회는 맞닿아있다. 세상에서 물자가 움직이는 방식이 크게 바뀔 때, 이를테면 전쟁, 정권의 붕괴, 혁명, 전염병, 기후변화 등, 혼란 속에서 기회의 냄새를 맡은 트레이더가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점령국 일본과 그보다 앞서 오랫동안 서구 식민모국의 원자재 공급지였던 동남아시아에서는 전후 수습과정에서 Robert Kuok과 같은 걸출한 화교상인이 말레이 반도를 오가며 쌀과 설탕을 사고팔아 오늘날 Wilmar International의 근간을 세웠고, 중동전쟁과 이란 혁명 시기에는 기존 석유 메이저 Seven Sisters의 카르텔에 도전하여 현재 원유 트레이딩의 기틀을 마련한 젊은 마크 리치를 비롯한 트레이딩 업계의 선구자들이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장식한 80년대 후반은 지금의 러시아 석유재벌들이 탄생하던 때로 그 이면에는 수많은 트레이더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당시의 혼란기에는 정말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외에도 천연자원은 풍부하지만 자금줄도 네트워크도 부족한 개발도상국들이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가는 속에서 자신들이 부족한 자금과 네트워크를 보유한 트레이더들에게 손을 뻗치면서 법과 규제를 벗어난 행위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통상 한 나라의 일인당 GDP가 4천 불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원자재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이를 거친 많은 나라들에서 우리는 트레이더들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온갖 정치가, 혁명가, 독재자, 유력 토호, 군사지도자 등과 결루되었으며 뇌물수수, 탈세, 제제 위반, 환경파괴 등의 문제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았다. 정보가 지금처럼 투명하지 않던 시기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좋은 이러한 스캔들은 언론과 작가들에 의해 더욱 자극적으로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지구의 속살을 파헤치고 영혼도 팔 수 있는 악마적인 존재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대부분 일반 B2C 소비자를 상대하지 않고 상장이 되지 않아 정보 공개의 의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굳이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이 점차 투명해지고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기존과 같은 관행이 더 이상 이윤적인 측면으로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트레이더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시장이 성숙하게 자리 잡은 곳에서는 과거와 같은 특수한 인간관계의 역할이 줄어든다. 정보 통신의 발달은 그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정보의 우위를 무기로 삼던 트레이더의 무기를 녹슨 것으로 만들었다. 손안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오늘날의 시장 참여자와 트레이더 사이에는 정보의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십 년 전 과거의, 그것도 각색된, 이미지를 그대로 원자재 트레이더에 투영하는 것은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원자재 트레이더들이 더욱 어질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장이 그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더를 움직이는 것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의 이윤이다. 정치, 도덕, 종교 등 한 개인으로서 지닐 수 있는 지향점은 우리는 트레이딩에서 분리한다. 우리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각자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고민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자원의 배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효율적인 것이 가장 선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아름다운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 영역이 아니다. 시장에서 화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하는 화살을 싼 가격으로 얻고, 갑옷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원하는 갑옷을 싼 가격으로 얻도록 하면서도 돈을 버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시장에 누가 올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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