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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정 Jan 23. 2022

곡물 트레이더를 꿈꾸는 이들에게

예측가능한 경로를 원한다면?

만약 보다 예측 가능한 경로로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이제는 나 또한 후배 트레이더 지망자들의 입사지원서를 받고 인터뷰를 보고 멘토가 된 입장에서 살피게 되는 포인트는 무엇이 있을까? 나 자신이 부족함을 느끼거니와 최근 들어 더욱 필요성이 대두되는 역량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들은 곡물메이저들의 주요 해외거점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한국인 학생 또는 업계 종사자들을 독자로 가정하여 답한다. 질문에 답하는 저자의 경험은 지리적으로는 싱가포르와 회사 두어곳의 경험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다른 지역 동료직원 및 싱가포르 내 동종업계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알게 된 내용 중 겹치는 대강을 정리한 것이니 아마 크게 현실과 다른 부분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에 앞서 해외에서는 어떤 경로로 인력을 선발하는지 알아보자. 곡물업계에서 ABCD를 비롯하여 COFCO, Glencore 등의 트레이딩 하우스는 대부분 "graduate trainee"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는 갓 대학을 졸업한 또는 졸업을 앞둔 어린 학생들을 뽑아 말 그대로 훈련(train)시키는 과정이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최소한의 월급을 주면서 트레이딩과 관련된 여러 부서를 순환하며 트레이딩 데스크의 잡무를 돕고 기초적인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Trainee들은 이 경험을 통해 여러 품목을 짧게나마 경험해볼 수 있고 트레이딩과 관련된 백/미들오피스의 기능들을 이해하게 된다. 각 트레이딩 데스크의 입장에서도 손이 부족한 admin 성격의 일들을 똑똑하고 에너지 넘치는 직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좋다. 어떻게 보면 이 과정은 한국의 신입사원 선발과정에서 수습기간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나, 수습기간은 수습기간대로 probation period라는 개념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인턴과도 다른데, 인턴은 통상 재학기간에 방학 등을 이용하여 짧게 2~3개월 일하는 반면 graduate trainee들은 이미 인턴경험을 다 갖추고 (많은 경우 비슷한 원자재 트레이딩 업계나 은행에서)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등에서도 흔히 운영되고 있으며, 곡물 뿐만 아니라 원자재 트레이딩 업계 전반에서 나름 역사가 오래된 전통이다. 원자재 트레이딩의 전설 같은 존재들도 한때는 어린나이에 이와 같은 도제식 인재 육성의 밑바닥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잡심부름 같은 일들을 실수 없이 해내고 어깨너머로 선배 트레이더들이 하는 일들을 눈치 빠르게 배워나간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어찌 보면 원자재 트레이더가 되는 가장 정석적인 경로로, 명문 MBA나 박사학위 같은 학벌이나 학력보다 실질적인 경력과 높은 근무강도를 견딜 수 있는 직업윤리를 중시하는 트레이딩 업계의 분위기가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트랙의 경우 현지의 대학 졸업생 또는 비자 소지자가 아니고서야 지원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방법이다. 비용도 별로 들지 않고 아직 요구되는 능력의 차이가 크지 않은 단계에서 굳이 회사입장에서는 비자 문제 등 번거롭게 신경 써야 할 일만 더 많은 바다 건너 외국인 졸업생을 뽑을 동기가 크지 않다. 갓 대학을 졸업한 지원자 입장에서도 국내의 다른 많은 좋은 기회들을 놔두고 박봉으로 비싼 생활비를 감당해야하는 외국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만약 국내대학 졸업자 출신으로 현재 한국에 있는 상태에서 이 프로그램을 목표로 한다면 현실적으로 현지 영주권자 또는 취업비자가 이미 해결된 다음이어야 기대를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경우는 어떨까? 경력직 또한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국경을 넘어 이직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싱가포르 내 트레이딩 업계에서는 회사를 넘어 이미 그들만의 끈끈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고 이는 업계 내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SMU (Singapore Management University) 학연까지 이어진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기 이전, 싱가포르에는 Trader's Guild라는 업계 모임이 있어 분기에 한번 정도 늘 마리나베이에 있는 펍에서 친목모임을 가지고는 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다들 맥주 한잔씩 하다보면 곡물시장 뿐만 아니라 이직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이 안에서 돌고 돈다. 사실 싱가포르 출신 트레이더들에게는 그쪽이 더 큰 관심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가 어디에서 지금 힘들다더라, 누가 어디로 옮긴다던데 등의 카더라 통신은 끝이 없으며 실제로 A에서 일하던 친구가 B에서 보이고 B에서 일하던 친구가 A에서 보이는 일이 흔하다. 마치 축구 프로리그의 이적시장처럼 말이다. 이같은 인의 장벽을 뚫고 한국에서 싱가포르 트레이딩 하우스로 단숨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려우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흥미를 끌 수 있는 관련분야의 한국회사 또는 한국에서 들어갈 수 있는 외국계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이직을 하고자 하는 현지에 주재원이든 해외파견으로 일단 넘어와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국경의 이동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특히 내가 있는 싱가포르에는 비자문제가 발목을 잡는 사례들을 적잖이 보았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이미 현지 취업비자가 있어도 일단 출국을 하고 나면 돌아올 때 입국이 막히는 리스크가 나 같은 외국인 근무자들에게는 항상 있을뿐더러, 본국에서 정식으로 주재원 또는 해외파견 발령이 난 이후에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 입국에 곤란을 겪는 경우들도 있었다. 점차 국경은 다시 열리겠지만 회사는 이런 번거로움과 리스크를 원하지 않는다. 이를 고려했을 때 현지 취업비자가 해결되어 있는 상태는 분명 도움이 된다. 나아가 현지에서 몇 년 정도 일을 하면서 네트워크와 평판도 쌓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곡물 트레이딩 하우스의 흥미를 끌 수 있으면서 우리나라에도 기회가 많은 관련분야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번째는 해운업이다. 곡물뿐만 아니라 철광석 석탄 등 소위 dry bulk commodity는 대부분 부정기선인 벌크선으로 운송된다. 바다를 건너 거래되는 FOB/CNF trading에서는 해상운임의 경쟁력이 매우 중요하며, 해상운송에 대한 이해는 곧 FOB/CNF 트레이더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해상운임을 사고파는 것도 그 자체로 트레이딩이며 실제 freight trader들의 논리구조나 세계의 물동량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은 원자재 트레이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은 하림그룹의 계열사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벌크선사 팬오션에 곡물 트레이딩 기능이 있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는 사료산업이다. 곡물무역이 일어나는 수요의 주축은 사료산업이다. 가축의 에너지 공급원인 옥수수, 단백질 공급원인 대두박은 농산물 중에서도 가장 commodity의 성격을 많이 띤 품목들이다. 특히 여전히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식용곡물은 상대적으로 자급도가 높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아도 식용곡물은 밀, 옥수수, 대두, 쌀 등을 다 합쳐도 5~6백만톤 언저리지만 사료곡물은 옥수수만 8~9백만톤을 수입하며 사료용 밀, 대두박, 주정박 외 각종 박류 등을 합치면 그 양이 훨씬 많다. 우리나라 사료구매단체들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이 한번 움직일 때면 시장에서 촉각을 곤두세운다. 해외진출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이뤄졌다. 구매 직무에서 경력을 쌓는다면 이미 어느 정도 무역과 관련된 기본적인 개념을 접할 수 있고, 무엇보다 트레이더들이 궁금해 하는 바이어들의 의사결정논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업계 내에는 트레이더와 바이어를 왔다갔다 하는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동남아시아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CJ인터내셔널도 앞서 진출한 사료산업을 기반으로 회사 차원에서 트레이딩까지 확장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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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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