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으로 시간이 남아돌 때
드라마 대신 소설로 불어 공부를
책을 좋아하지만 작년 11월과 12월은 정말 미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읽다만 책들이 쌓여갔더랬다.
몬트리올에 오니 시간이 남아돈다. 인생에서 이렇게나 한적한 날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전에 세 시간 어학원에서 불어 공부마저 안 했으면 심심해 죽을 뻔했다.
짐을 간소화하느라 책을 불과 세 권 밖에 챙겨 오지 못한 게 이렇게 후회스러울 줄이야. 남편이 지난달에 모자 꾸러미와 더불어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보내주었지만 단편집이라 띄엄띄엄 읽고 있다. 한 달 남짓동안 읽은 책을 모아보니 그림책을 포함해 무려 열 권이 넘었다. 시간이 남아돌며 이런 일이 생긴다는 놀라운 사실.
불어 문장을 공부하려면 무슨 책이 좋을까 하던 와중에, 위고 선생님이 니콜라스 디크너라는 작가를 소개해 주었다. 몽후아얄의 근사한 동네책방 <La port de tete>에서 신중하게 <Nikolski>라는 책을 골라 잡았으나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갔다. 배경이 알라스카 쪽인 데다 지리적인 지식도 필요하고 웬 모르는 단어가 그리 많은지... 한 문장에 서너 개씩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이 출몰했다. 게다가 중요 사건은 언제쯤 나오려는지 계속 밑밥과 던지는 통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결국 서른 페이지 정도 읽다가 포기하고 뭐를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쟈끄 골드슈틴의 아내 지네뜨(Ginette)가 유전을 던져 주었다. 바로 일본 작가 아끼 시마자키(Aki Shimazaki).
시마자키는 1981년에 캐나다에 와서 처음 불어를 배우기 시작해 2004년부터 불어로 소설을 낸 이력의 소유자다. 불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문장이 간단명료하다. 심플한 문장들이지만 힘이 있고 감정이 묻어 난다. 아마도 불어에만 존재하는 대명동사(수동태로 전환하지 않고도 타동사를 자동사로 만드는 동사)를 기가 막히게 구사하면서 문장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내놓는다.
지네뜨가 읽으라며 준 <Azami(일본어로 '엉컹퀴'라는 뜻)>는, 섹스리스 부부인 것 외에 아주 평온한 삶을 영위하던 한 남자가 엉겅퀴라고 별명을 붙인 첫사랑을 우연히 만나면서 환희와 고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이야기다. 결국 아내에게로 돌아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끝나지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읽을 책이 또 떨어지기도 했고 시마자키의 작품 세계가 사뭇 궁금하기도 하여, 지난주에 위고 선생님에게 소개받은 중고 책방 <L'Echange(우리말로 '교환'이라는 뜻>에 들렀다. 거기 있었다. 시마자키의 소설들이 나란히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걸 보니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시마자키의 책은 모두 제목이 한 단어다. 주로 사람의 이름이거나 별명, 사물의 이름이다. 책 제목에서도 강단이 느껴진다. <Hotaru>와 <Mistuba>를 골라 왔다.
<Hotaru>는 주요 시대적 배경이 1945년 8월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던 바로 그 시기이다. 당시에 나가사키에 살던 주인공 마리꼬는 이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늙은 할미다. 유일하게 말벗이 되어주는 손녀 츠바키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면서 감춰진 과거를 드러낸다는 설정이다. 원자폭탄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운명의 날에 마침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살인 사건이 묻혀 버린다. 그 집 딸이 아니었으면 자기가 죽였을지 모를 야비한 정부의 죽임이.
<Mistuba>의 배경은 도쿄와 고베, 그리고 몬트리올이다. '상사맨'인 타카시가 사랑하는 여인 유꼬를 은행가의 자제에게 뺏기고 몬트리올 지사로 발령받으면서 이야기는 심심하게 끝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열 페이지에 상상하지도 못한 반전이 숨어 있을 줄이야. 고베에 강도 7.2의 지진이 나면서 유꼬는 죽고 출생의 비밀이 판도라 상자를 열고 나온다.
불륜과 출생의 비밀 같은 클리쉐는 꽤나 식상하지만, 시마자키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힘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불어가 모국어가 아닌데도 자기만의 필체를 구사하면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능력도 탐난다. 지네뜨가 농담 삼아, "너도 나중에 불어로 책을 써 봐."라고 한 말이 귀에서 맴돈다.
오늘 다시 두 권을 사 왔다. <Homaguri>와 <Tsubame>. 이번 주에는 이 두 권으로 불어 문장 공부를 하리라. 소설을 구성하는 법도 엿보고 불어도 배우고. 꿩 먹고 알 먹고.
쟈끄 골드슈틴이라는 놀라운 작가
<꼬마 난민 아자다>를 번역하면서, '이렇게 황당한 모험을 생각해 내는 작가는 어떤 분일까?' 궁금했더랬다. 작년 4월에 일산의 작은 동네책방에서 만나고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귀엽고 발랄한 할아버지였다. 지난달 21일에 초대를 받아 갔더니 아내 지네뜨와 함께 얼마나 따뜻하게 환대를 해 주던지 감동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페이퍼> 봄호에 실릴 예정)
쟈끄 할아버지의 최근작은 <Les Etoiles(별들)>이다. 별을 좋아하는 유대인 소년과 무슬림 소녀가 서로 절친이 되었다가, 두 집안의 반대로 억지로 헤어졌다가 어른이 되어 천문학자로 다시 만난다는 귀엽고도 절절하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 쟈끄의 그림체는 자유로우면서도 따스하고 익살스러워서 무거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역시나 최근에 '익살꾸러기상 Prix Espiegle'에 뽑혔는데 상 이름 치고는 우스꽝스럽다 싶으면서도 쟈끄의 작품세계와 딱 들어맞는 상이 아닐 수 없다.
쟈끄의 책을 읽다 보면 '사회 갈등이나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굳이 어둡고 심각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이른다. 오히려 반대로 유머와 익살, 상상력과 모험을 최대한 동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슈에 스스럼없이 다가오게 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지 않은가.
<국경 없는 죄수들>도 같은 맥락에서 작은 감동을 건네준다. 독재 정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세계 각지에서 편지가 날아들고 결국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가 큰 새가 되어 죄수를 탈출시킨다는 내용이다. 사실 황당하다. 그저 상상일 뿐인 데다 허망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양심수들에게 관심을 갖게 해 준다. 글이 하나도 없는 책인데도 한 장 한 장 눌러 읽게 된다.
쟈끄 할아버지와 아내 지네뜨 할머니가 오늘(3.12.)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온다. 두 번째 만남은 아마 최근 번역을 마친 <난민도 우리 친구야>(가제, 북뱅크)의 작가 엘리즈 그라벨과 함께할 예정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듯, 엘리즈 작가도 몬트리올에 산다.
지네뜨가 권해 준 책. 시마자키에게 빠져들게 한 첫 책이다. <Azami>
쟈끄 작가 댁에서 '아름다운 저녁'을 보낸 후에. 서로의 신작을 들고.
나그네를 정성스럽게 대접해 준 지네뜨와 함께. 역시나 엄청 귀여우시다.
항상 그림을 각각 다르게 그리고 사인을 해 주신다. "몬트리올의 아름다운 저녁을 기억하면서 한국에서 언젠가 별을 바라보기를 기대합니다." -쟈끄 골드슈틴
이번에 새로 번역한 책, 엘리즈 그라벨의 <난민이 누구에요?> 한국어판은 <난민도 우리 친구야>(가제, 북뱅크)로 출간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