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은 소시민 개인의 실존을 다룬 단편 <외투>와 <코>로 매우 유명한 작가다. 그런 그가 쓴 중편 소설 타라스 불바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띤다. 이 소설 역시 인간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민족의 실존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민족주의 사상이 가득 들어가 있는 프로파간다 수준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재밌게 읽은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묘사다. 대략 1600년대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사크들의 생활상과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정말 생생하게 그려낸다. 마치 정말로 타라스 불바가 처형당하기 전에 그를 찾아가 그의 얘기를 들어본 것 마냥. 고골은 코사크들이 누리는 '자유'를 매우 적나라하고 또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들이 초원과 마을을 누비며 누린 그 자유를 말이다. 코사크들은 매우 민주적인 동시에 권위적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들에겐 뚜렷하게 정해진 지도자가 없었다. 지도자가 필요할 때 -예를 들어 전쟁이나 약탈을 할 때- 연장자들 중에서 사람들이 더 지지하는 쪽을 선출해 그를 대표로 삼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시끌벅적한 그들만의 자유로운 삶으로 되돌아갔다. 그들 민족의 소위 낭만 넘치는 생활양식을, 고골은 드넓은 우크라이나 초원과 하늘처럼 명료하게 펼쳐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이야기이다. 사실 민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클리셰는 정말 오래된 것이지만, 오래됐기에 매력적인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 소설의 주인공 타라스 불바가 싸움을 원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의 두 아들이 어엿한 코사크로 살기 원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러시아 신학교에서 10여 년 간 공부를 하고 돌아온 상태였기에, 전쟁을 통해 그들 내면에 코사크의 야성을 심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이 코사크의 삶이 아니라 사랑을 택하고 코사크에 맞서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불바는 다른 아들과 함께 민족을 배신한 자신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야 만다. 그 전쟁에서 남은 아들마저 적들에게 포로로 잡히고, 타라스 불바는 아들이 진정한 코사크로서 처형당하는 것을 직접 목도한다. 장성한 두 아들을 환영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두 아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세 번째 이유는 그 작가, 고골이다. 사실 이것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고골이기에 재밌었다. 한 민족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벌어지는 비극을 이야기하는 매체는 정말 많지만, 결국 이 투쟁극은 고골이 쓴 것이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고골 그 자신이 우크라이나 태생 러시아 제국민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익살과 해학이 이 비참한 이야기에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는 점, 이 비참함을 숭고한 동시에 허무한 이야기로 묘사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고골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시민적 일상 속 비일상을 통해 사회를 통렬하게 비꼬던 고골의 단편에 익숙하던 내게 이 소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 수도 있는 작가였다는 게 놀라웠다. 하긴 애초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니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놀라웠고 즐거웠다. 그가 이토록 고향의 민족과 정체성을 사랑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기 전엔 몰랐다. 누군가 내게 코사크란 어떤 것인가 묻는다면,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 소설 타라스 불바를 건넬 것이다. 언제나 덧붙이는 말이지만, 이 글은 그저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부족한 게 있다면 양해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