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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부담 Apr 19. 2020

어쩌다, 플랜테리어

집에 초록이 왔다

작년에는 여러모로 힘든 일이 많았다. 갖은 이별수에 지독하게 당했고 낮밤으로 울어내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체력과 감정을 끌어다 쓴 탓에 일상생활에 통 집중할 수도 없었다. 일을 하면서도, 일이 끝나고서도 쉽게 무력해졌다. 나의 삶은 체력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한번 무기력에 빠지자 체력과 열정으로 가득 벌여놓았던 일들이 깨지지 않는 벽처럼 다가왔다. 그때부터는 꽤 오랜 시간 수동적인 태도로 삶을 보냈다. 삶을 유지하겠다는 어쭙잖은 마음으로.


작년에 스스로 결정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유일한 것이 독립이었다. 나를 옥죄던 많은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들 중엔 퇴보가 아닌 전진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독립을 결정한 후에도 선택하고 고민할 것들이 많았다. 집을 고르고 가구를 고르고 짐을 옮기는 일까지 모두 끝내고 나서야 나의 집에서 한 숨 쉴 여유가 생겼다. 벗어나고 도망가다 보니 겨울이라니. 나에게는 최악의 한해였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 일주일 간 제주를 다녀왔다. 제주여행 이후에는 꽤 많은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독립을 하고 여유가 생겼기에 에너지가 서서히 회복된 것인지 아니면 일주일 쉼이 다시 동력을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제주여행이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수 있는 좋은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사실이다. 제주여행 이후 여운이 컸는지 제주에서 먹은 귤과 질리게 보았던 동백꽃이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제주여행과 겨울을 핑계 삼아 귤 한 박스와 동백나무를 집에 들였다. 제주여행이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제주에서 본 동백꽃이 너무 예뻐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겨울 속에서도 꿋꿋하게 꽃을 폈던 동백나무에게 괜한 감동을 먹었는지도 모르지. 동백꽃을 들이기로 했던 때에는 작은 것에 마음이 동했고 작은 것에 삶의 이유를 붙이기도 했으니까. 나의 소비와 결정을 한 가지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유가 있고 이미 결정을 한 이상 그 결정이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는 크게 이유가 없었다.

한동안은 퇴근해서 식물을 관리하는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물 주기는 어떻게 하고 공증 습도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갈변한 잎과 가지치기는 어떻게 하는지. 하나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에는 많은 책임과 힘이 들었다. 그리고 정성의 끝에 꽃이 폈을 무렵에 뿌듯함이 생기기도 했다. 책임감은 나를 옥죄기도 했지만 결국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이런 책임감과 책임 끝에 오는 결과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집에 들인 동백나무에서 꽃이 올라오는 시점에는 심신이 꽤 안정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의 동백


동백나무를 들인 지 3개월, 집에 새로운 식물을 하나 더 놓고 싶었다. 이번에는 꽃에서 받은 삶의 의미 때문도 아니고 마음이 동하거나 감동을 받아서도 아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우리 집에 색깔을 더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잎이 넓고 큰 식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식탁이나 침대보다는 큰 키, 그래서 내가 아침에 눈을 뜨거나 집에 왔을 때 팔을 크게 흔들고 반겨주는 식물. 그래서 양재 꽃시장을 가서 여인초를 데리고 왔다. 꽃시장을 5바퀴나 돌아 좋은 가격에 관리가 잘 된 여인초 세 줄기를 집에 들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잎이 넓은 여인초 세 줄기. 여인초는 안 방에 놓았다.

키 크고 잎이 넓은 여인초 세 줄기


덕분에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힘차게 손을 뻗는 걸 본다. 무채색으로 갇혀있던 집에 초록색을 더하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무채색 도시에 초록이 찾아오다니. 재택근무를 하면서 햇빛에 잎이 반짝이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햇빛과 초록이 주는 반짝임. 잎이 햇빛에 반짝일 때마다 기분이 편안해진다. 초록과 햇빛이 주는 따사로움, 새순이 주는 설렘, 힘차게 뻗은 잎의 힘참.

햇빛과 초록이 오는 시간

여인초와 동백나무가 우리 집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또 다른 식물을 집에 들일 지도 모른다. 틸란드시아가 될지, 바질 나무가 될지, 고무나무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동백꽃과 여인초를 들이면서 내가 받았던 단단한 안정과 따스함을 또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올 해는 왠지 설레고 힘찬 일이 많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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