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는 있다.
지그지글러
지그 지글러의 문장을 읽자마자 펜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는 있다."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이건 아쉽지만 진짜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 이 모든 것들을 품에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완벽했던 적이 없는 내 삶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건, 결국 나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기점을 지금으로 잡고 시작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시작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되뇔수록 벅차고 울컥했다.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왜 후회만 하고 살았는지, 그 후회의 날들이 후회될 정도로 나는 새로운 시작이 서툴고 힘든 사람이었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이렇게 간단하고도 소중한 진리를 왜 몰랐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완벽한 출발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의 실수들을 지우개로 말끔히 지우고, 깨끗한 새 종이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써 내려간 이야기의 페이지들을 뜯어낼 수도 없다. 그래서 때론 좌절하고 때론 포기하고 싶어진다. 얼룩진 캔버스 앞에서 붓을 놓고 싶어 하는 화가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글러의 말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지만 그 위에 새로운 색깔로 덧칠할 수는 있다. 얼룩도 그림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실수도 이야기의 반전이 될 수 있다.
필사를 하며 마음이 환해진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것은 허락받은 듯한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지금부터라도 충분하다는 허락 말이다.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누군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 시작할 수 있잖아"라고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한 마디가 주는 위로란.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항상 '만약에'라는 가정법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만약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만약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만약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날들이 끝이 있을까 했었다. 그 모든 '만약'들은 결국 지나간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지금 이 순간. 날 묶어왔던 사슬을 모두 던져 버리고... 찰떡같은 노래 가사들이 자연스럽게 재생된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건 실패가 아니라 불완전함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작하지 못하면 아예 시작하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의 덫에 스스로를 가둬놓았던 거였다. 하지만 완벽한 시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작은 서툴고 어설프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 아닌가.
작은 변화도 시간이 지나면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말처럼 오늘의 작은 결심이 내일의 새로운 풍경을 그려낼지도 모른다. 아주 작게라도 방향을 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빛으로 이어질 테니까. 중요한 건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길이 되고, 그 길이 결국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은 모두 완벽한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상처받고 넘어지고 실수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다웠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었다. 내 삶도 그런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펜을 다시 들어 문장을 마저 써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이란 거창한 선언이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다르게 바라보기로 하는 결심일지도 모른다.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었다.
어제까지의 나는 과거에 발목을 잡혀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오늘부터의 나는 과거를 딛고 서서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과거는 내 짐이 아니라 내 토대가 될 수 있다.
실패한 경험들도, 아픈 기억들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재료들이었다.
지금도 누군가는 새로운 출발점을 기다리며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말이다. 완벽한 준비는 끝나지 않지만, 불완전한 시작은 언제든 가능하다.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펜을 놓으며 웃음이 났다. 이 글조차 완벽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새롭게 시작하고 있으니까.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두 번째 출간책 사전예약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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