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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거야?라고 말하던 내가 변한 이유

by 꿈꾸는 나비



"또 그거야?"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딸이 같은 영상을 틀어달라고 할 때마다, 같은 노래를 무한반복 들을 때마다 나오는 내 첫마디였다.



나는 한 번 본 드라마나 영화는 다시 잘 안 보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볼 것이 너무 많으니까. 이미 본 것을 또 보는 건 왠지 다른 무언가를 놓치는 것 같아서 늘 새로운 콘텐츠를 찾아 헤맸다. 그게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걸 경험하는 삶이라고 확신했다. 변화를 추구하는 내 모습이 꽤 만족스럽기도 했고.




그런데 우리 딸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진짜 지겹도록 똑같은 것만 봤다. 같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같은 노래를 하루 종일 반복해서 들었다. 처음엔 답답했다. 왜 저렇게 같은 걸로만 시간을 보내는 걸까?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또 그거야?"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막상 옆에 같이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깔깔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같은 장면도 다시 보면 다르게 보이고, 전에 놓쳤던 부분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딸 덕분에 알게 되었다. 처음 볼 때는 큰 줄거리에만 집중했다면, 두 번째엔 캐릭터의 미묘한 표정이, 세 번째엔 배경음악의 절묘함이, 네 번째엔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의 의미가 보였다.







특히 딸이 즐겨보는 '흔한 남매'와 '케데헌'은 우리 집의 주말 의식이 되었다. 처음엔 "또 케데헌이야?" 하며 투덜거렸지만, 어느새 나도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함께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배꼽을 잡고 웃게 되는 것이다. '아, 역시 이 장면이 웃기는구나', '이 대사 정말 기가 막히네' 하면서. 내가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면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제법 있었구나 싶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변화는 더욱 명확해졌다. 같은 경험을 다시 되짚어보고, 다시 써보고, 또다시 다듬어가면서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의미들이 하나둘 드러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글쓰기란 결국 같은 기억과 감정을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던가.


엊그제는 여느 때처럼 좋아하는 구절을 찾아 필사하고 있었다.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쓰다 보면 그냥 읽을 때와는 다른 깊이로 문장이 와닿곤 했다. 내가 필사를 즐겨하는 이유다. 그날도 펜을 들고 천천히 써 내려가던 중 한 문장에 손이 멈춰졌다.


결말이 뻔한 드라마도
한 장면 한 장면이 소중한데,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 삶은
얼마나 더 소중하겠어요.

— 여이지
『별일 없어도 내일은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쓸수록 가슴이 뜨끔했다. 유난히 마음을 콕콕 찌르는 문장이었다. 왜 이렇게 마음을 찌르는 걸까? 어쩌면 내가 딸과 함께 경험한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이 의미였을까.


나는 사실 드라마든 예능이든 내 삶이든 늘 성의 없이 봤다. 밥 먹으면서, 설거지하면서 틀어놓고, 핸드폰 만지작거리며 딴생각하다가 중요한 장면들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끝까지 봤다고 다 경험했다고 우겼다. 아는 척이 심했고, 다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세세하게는 말할 수 없어서 늘 얼렁 뚱땅이었다.

필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문득 이 모든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딸이 가르쳐준 것들, 내가 변해가는 과정들, 그리고 이 소중한 깨달음을 말이다.


그동안 안 쓰고 뭐 했는지 참. 새로운 것만 쫓아다니느라 정작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깨달음은 글을 쓰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하나의 경험을 깊이 파고들어 글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이렇게 변하고 성장하고 있나 보다.


딸과 함께한 반복의 습관은 그래서 내게 소중한 배움이 되었다. 최근에는 전에 봤던 드라마를 1화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결말도 알고, 모든 반전도 기억하고 있는데도 새롭게 몰입되는 것이 신기했다. "아, 이런 복선이 있었구나", "이 장면에서 이미 암시하고 있었네" 하면서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복이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층층이 쌓여가는 이해의 과정이라는 것을 딸 덕분에, 그리고 글을 쓰면서 점점 깨닫고 있다. 이제는 나도 같은 책을 몇 번이고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질리도록 듣는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놓쳤던 아름다움을, 지나쳤던 감동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깊은 의미를.


진짜 중요한 건

많이 보는 게 아니라 깊이 보는 것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내가 좋다.


딸 덕분에 시작된 작은 변화가 글쓰기를 통한 성장과 만나면서 더 큰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또 그거야?"라고 말하던 내가 이제는 "다시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드라마 한 장면은 물론 실제 내 삶도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매 순간이 명장면이 될 수 있다. 놓치지 않게 반복해 보고, 온전히 집중해서 살아내야 그 안에 숨어 있는 소중한 메시지들을 놓치지 않게 된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해서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지혜롭게, 더 깊이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한 번에 다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인생의 재미일까? 반복을 통해서만 서서히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소중한 것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또 그거야?"에서 "또 보자"로.


이 작은 변화가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주는지 요즘 매일이 지루하지 않고 즐겁다.



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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