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갔다. 엄청난 비가 내렸고, 땅 곳곳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출퇴근길의 소로는 잠시 개울이 되었고, 다리 아래로 평소 말라있던 계곡들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제주와 서귀포를 오가며 출퇴근을 한다. 태풍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던 그날의 밤 퇴근길은 운전하는 시야를 한 치 앞도 허락하지 않는 폭우가 내렸다. 와이퍼를 최대로 작동시키며 조심스레 운전을 하다가 미처 보지 못한 물 웅덩이에서는 바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런 날에는 물이 잘 빠진다는 화산섬의 특징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되려 땅 아래로 흐르던 빗물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땅 위로 솟구쳐 흘렀다. 그런 현상은 바닷가일수록 더 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고도가 낮아지고 바다가 가까워지면서 바퀴는 어둠 속에서 자꾸 물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졌다.
이번 태풍은 엄청난 폭우를 동반했다. 소형 태풍이어서 그런지 바람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이 섬에 산다는 것은 여름 가을이면 수시로 올라오는 태풍에 민감해지는 일이다. 태풍의 강도와 경로에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태풍이 품고 오는 비와 바람에도 역시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비와 바람을 두고 더 신경 쓰이는 것을 고르라 한다면 바람이다. 아마, 이 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람을 선택할 것이다.
바람은 두렵기까지 하다.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대형 태풍이 제주를 통과하던 어느 해에는 마당 한편에 붙여 세워 두었던 묵직한 탁자가 마당으로 날아가 버린 적도 있다. 어느 집 지붕이 날아가고, 도로 신호등과 표지판이 꺾이고 떨어지는 건 예사였다. 바닥에 고정하지 않은 컨테이너 건물이 나동그라진 적도 있었다. 그 바람에 내 텃밭이 무사했을 리 없다. 바람을 직통으로 맞은 5년생 홍매화가 어느 날 뿌리를 땅 위로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그 옆으로 단풍나무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석류나무와 살구나무는 간신히 뿌리를 땅에 숨긴 채 손만 대어도 흔들렸다. 기역자 구조의 집 건물 안쪽 가장 안전한 곳에 심어 둔 감나무에서는 매달린 풋감들이 죄다 떨어지기도 했었다. 그 옆의 티트리 나무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나는 기울고 쓰러진 나무들을 일으켜 세우고 각목을 알맞은 길이로 잘라 지지대로 받쳐 주었다. 그럼에도 몇몇 나무들은 살아나지 못했다. 고추나 가지, 토마토 역시 가지가 꺾이고 줄기가 부러진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이파리들은 바람에 깎이고 타버려서 찢어지고 검게 병들어갔다. 바람을 겪어낸 내 텃밭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이번 태풍은 바람 걱정은 없었다. 비의 양이 엄청났지만, 집 뒤편으로 지나는 물길은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어 침수 걱정도 없었다. 집안에 물이 솟아나는 곳도 없었다. 대신,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빗물이 바람을 타고 집을 때리면서 소소한 곳에서 비가 조금 샜다. 확인한 자리들을 날이 좋을 때 실리콘으로 작업해야 한다. 텃밭도 무사했다. 조금 성기게 묶인 토마토 지주대 하나가 조금 기울어졌을 뿐, 피해는 거의 없었다. 되려, 넉넉하게 스며든 빗물에 고추와 가지들이 엄청나게 열리고 커졌다. 생강순은 좀 더 키를 키웠고, 콩들은 더욱 무성해졌다. 곳곳에 달린 수박 호박 물외들도 크기를 더욱 키웠다. 마당 한 켠의 참외덩굴에는 참외가 작고 파랗게 매달렸다.
엄청난 비가 내리기 전에 잡초제거 작업을 마무리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비를 맞은 마당과 텃밭에서는 다시 잡초들이 싹을 틔우고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뒤뜰에서는 뿌려둔 바질과 루꼴라들이 싹을 틔우고 이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원래부터 자리하던 잡초들이 남은 뿌리에서 그보다 더 빨리 줄기와 이파리들을 올리고 있었다. 다시 호미를 잡고 쪼그리고 앉아야만 하는 나의 숙명, 그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노동의 순환을 느껴야만 하는 풍경이었다.
비가 그친 지 며칠이 지났지만, 내린 비의 양이 무척 많아 그런지, 집 뒤의 배수로에서는 여전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장갑을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호미를 쥐고 주저앉은 마당의 흙은 넉넉하다 싶을 정도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뽑아내는 잡초들엔 물이 가득했고, 잡초를 뽑는 옆의 호박 줄기와 오이줄기들은 뜨겁게 쏟아내리는 햇볕과 더운 바람을 버거워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이 되어 차를 몰고 달리는 소로의 물들은 양은 점점 줄어도 여전히 도로를 적시며 흐르고 있었다. 출근길에 지나는 엉또폭포의 입구에는 아직도 폭포수가 떨어지는지 그것을 구경하러 온 차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태풍은 무사히 지나가고 섬은 물을 가득히 품었다. 안기지 못하고 바다로 흐른 물들은 흙탕물로 해안을 황톳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날은 급격하게 더워졌다. 더운 밤 한치 낚시는 저 흙탕물이 가라앉은 다음에나 가능하겠구나 가늠해본다. 큰 탈 없이 지나간 태풍에 뒷수습할 일이 적으니 마음은 여유로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