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텃밭일기 09화

텃밭일기 #9, 20190718

by 전영웅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풍경은 달라진다.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 남은 건 움직일 수 없는 초록들 뿐이다. 저들끼리 싸우는 것인지 수다를 떠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저귐으로 마당 위를 날아다니던 새들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당에 누워 아침 햇살을 즐기며 잠들던 반려견도 한없이 우울한 표정으로 제 집 안에서 웅크린다. 초록의 사이사이에 박힌 듯 앉거나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없다. 마당의 텃밭과 집 주변 동네 너른 밭들은 쏟아지는 빗소리 아래 고요하다. 투박한 탁자 위에 놓인 단정한 도자기 접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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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나는 쉴 수 있다. 쉴 수 있기에 이렇게 감상 어린 시선으로 초록을 응시한다. 해가 나면 나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장화를 신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수건을 목에 감았다. 장갑을 끼고 호미를 쥔 다음, 무성하게 올라오는 잡초를 뽑아야 했다. 갑자기 너무 자라 지주대에 매달려 휘청이는 가지를 다시 고정해 주었다. 순식간에 많아진 고추를 따 주어야 했고, 어느 순간 덤불이 되어버린 토마토 줄기들을 잘라주고 매어주어 정리해야 했다. 늘어진 오이줄기를 그물망에 걸쳐서, 허공에 헤매던 덩굴손이 그물을 잘 잡고 오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호박과 수박은 덩굴을 정리해주고 둥글게 맺어 커지는 것들을 조심스레 다루었다. 수건으로 감쌌지만 땀은 대책 없이 흘렀고, 땀냄새를 맡은 풀모기들은 떼로 몰려와 달려들었다. 텃밭 안에서 주인이 땀을 흘리건 말건, 마당에 나왔으면 좀 놀아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반려견 녀석은 속절없이 낑낑댔다.


비가 오면 이 모든 것들이 정지된다. 비를 맞지 않는 공간으로 모든 것들이 숨어든다. 오로지 초록만의 세상이 펼쳐진다. 사람의 손을 타던 작물들은 내리는 비에 스스로 분주해진다. 땅 속에 무수히 숨은 잡초 씨앗들은 빗물을 먹고 발아를 시작한다. 스스로 분주함은 한 편으로는 거대하다. 사람의 노력으로 물을 주던 때와는 달리, 텃밭 전체가 웅장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 장마를 지나는 이때의 텃밭은 하루 잠깐 내리는 비에도 모습이 불쑥 변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변화 안에서, 나는 일거리를 만들고 거둘거리들을 챙긴다. 비를 맞지 않는 공간에서 비를 맞는 텃밭을 보며, 나는 잠시의 편안함을 누리고 비 개인 이후의 일거리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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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의 문명을 개척한 인간은 자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가볍게 내리는 비에도 영향을 받는다. 비가 와서 풍경이 달라지는 건, 마당의 텃밭이나 동네의 너른 밭들 만은 아니다. 진료실의 풍경도 달라진다. 이유 없이 온몸이 아파서 주사를 놓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관절 어딘가가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던 사람들이, 비가 오면 아픈 데가 더 아프다며 표정이 심각해진다. 오랜만에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환자들은, 비 때문에 쉴 수 있어 그 틈에 병원을 찾았다고 말한다. 비는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힘으로 인간의 감각을 휘두른다. 첨단의 문명은 여전히 날씨에 영향을 받아 한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를 좌지우지한다. 내리는 비에 나는 잠시의 편안함을 누리다 진료실로 출근한다. 날씨의 변화로 내가 잠깐 누린 편안함은, 누군가는 아픈 일이었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진료실 창 밖으로 비는 여전히 아스팔트 도로 위로 쏟아지지만,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차들의 모습은 여전하다. 여전함과 변화함, 소소하고 사적이며 미묘한, 그러나 웅장하고 거대한 변화.. 내리는 비에 내 주변은 이렇게 역동적인 경험과 깨달음으로 가득해진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내리는 비에 내 감성은 충만해지지만, 다가오는 태풍에 내 마음은 두려워진다. 소형급이라지만, 며칠 후면 내가 사는 이 섬을 관통한다는 소식에 집은 무사할지, 텃밭은 괜찮을지 벌써부터 마음이 바빠진다. 태풍과 태풍 같은 바람에 잃은 나무가 몇 그루다. 홍매화를 잃었고, 단풍나무와 귤나무를 잃었다. 태풍이 오는 매번 줄기가 꺾여 죽은 고추와 가지, 토마토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지나간 이후의 뒷수습에 마음의 준비만을 할 뿐이다. 퍼붓듯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고요해졌다. 비는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태풍에 이를 것이다. 편안함에 샘솟던 감성은 사라졌다.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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