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태풍을 앞두고 품을 들일 것은 없었다. 마음만 졸일 뿐이었다. 역대급이라는 태풍 바비가 제주도 서해상을 지난다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긴장 앞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별 일없이 지나가고, 지난 뒤의 상황에 별 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낮에 제주를 통과한다는 소식에 병원은 개원 이후 처음으로 태풍으로 인한 휴진을 결정했다. 반갑지는 않은 휴진이었다. 병원에서 졸이는 마음을 집에서 졸이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집 앞 진입로와 뒤뜰의 잡초를 정리한 후, 땀으로 범벅이 된 노곤한 몸은 올라온다는 태풍에 다시 긴장했다. 높은 지주대를 차지하던 것들은 모두 치웠으니, 사실 텃밭에 손을 댈 일은 없었다. 넘치는 먹을 것들을 거두는 일이 유일했다. 가을 텃밭 준비 역시 대략 마무리되었다. 태풍을 앞두고는 있었으나 시기가 배추와 무를 파종하는 때이니 태풍을 핑계로 미루기도 애매했다. 때마침 열린 오일장에 가서 배추 모종과 쪽파를 사고, 무와 바질 씨앗을 샀다. 태풍이 지나면 바로 심을 생각이었다.
태풍이 예정된 전날 밤, 바람에 날릴 것들을 마당 구석 한쪽으로 몰아두었다. 배추 모종은 창고에 넣어두었다. 마당의 반려견 녀석은 태연했다. 이제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다음날 아침부터 바람과 비가 번갈아가며 집을 때렸다. 창틀과 지붕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거실 창유리로 보이는 감나무가 이따금씩 바람에 휘청거렸다. 마당에 나와 바람을 즐기던 반려견 녀석은 비가 시작되자마자 집으로 들어가 드러누워버렸다. 마음에는 긴장이 가득했지만, 역시 당장에 할 일은 없었다. 집 한 두 군데 비가 새는 곳에 적당한 조치를 해 두고, 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제주에 산다는 건, 여름의 끝자락에서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태풍의 연이은 질주에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태연히 적응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태풍 전 눈에 보이는 위험요소가 있다면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별 일 없이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라야 하는 기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뒤 펼쳐지는 풍경에 나직한 겸손과, 묵묵한 수습으로 일상을 회복하는 단련이다. 나 역시 태풍 전 매우 간단한 조치를 했다. 태풍이 저 너머 바다 위를 지날 때, 창 너머 눈앞에서 바람에 찢기며 휘청이는 감나무의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책과 음악과 맥주 몇 캔으로 소리 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저녁, 아직 남아있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흐트러진 마당을 수습했다. 바비는 생각보다 약하게 지나갔다. 바람 위로 검은 구름이 빠르게 달리는 저녁 하늘 아래 마당 풍경은, 다행이다 라는 안도가 절로 나오게 했다. 비가 그치고 바람만 남은 마당으로 반려견 녀석이 다시 나와 배를 깔고 누웠다.
줄기가 펴진 채로 매단 가지가 무거웠는지, 가지 두어 그루가 바람에 옆으로 기울었다. 뿌리가 얕은 바질 세 그루가 바람에 누웠다. 그것 말고는 내 텃밭은 태풍을 잘 이겨내었다. 그것들을 다시 세워주는 건 잠깐이면 되었다. 태풍을 이겨낸 호박 줄기들이 더 생생해져서 마당과 공터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태풍이 지난 주말, 퇴근하자마자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갔다. 배추를 심고 무를 파종할 자리를 다시 정리했다. 이랑을 정비하고 잡초들을 뽑고,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호박과 참외 덩굴들을 정리했다. 바람에 무사한 바질 세 그루를 남기고, 바질 이랑의 쓰러진 바질들을 뽑았다. 쪽파를 심을 이랑도 넉넉하게 확보해서 잡초를 거두고 이랑을 정비했다. 적당한 간격으로 배추 모종을 심었고, 무를 파종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지금 바질이 먹을 만큼 잘 자라줄까 싶지만, 아직은 무더운 날씨를 핑계 삼아 씨앗을 파종했다. 쪽파는 촘촘한 간격으로 심었다. 가을 텃밭은 겨우내 다니며 이삭 줍기를 할 요량으로 크게 벌이지 않았다. 파전이나 파김치를 생각하고 쪽파를 넉넉하게 심었고, 매운탕에 넣을 요량으로 무를 파종했다. 배추는 잘 자라만 준다면, 예년처럼 이벤트 형식으로 김장을 담아볼까 싶다.
마당 돌담에 붙여 심은 사과나무가 있다. 봄에 꽃이 피더니 알아서 열 개 정도의 사과를 맺었다. 잘 길러서 가을에 거두어야겠다 했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하나하나 떨어지더니 여름의 시작 즈음에는 다섯 개가 남았다. 그중 두 개는 바람에 떨어지고, 두 개는 아들 녀석이 맛있다며 따서 먹어버렸다. 남은 사과 하나가 둥치 아래 가녀린 줄기에 매달려 흔들렸다. 태풍 소식에 ‘바람에 떨어지면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과는 위태롭게 매달린 모습 그대로 태풍을 이겨냈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했다. SNS에 자랑했더니 ‘일본에서는 태풍을 이기고 떨어지지 않은 사과들을 수험생의 행운을 기원하는 용도로 비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해 주었다. 아 그럼, 추석 전에 떨어지지 않으면 행운을 담은 사과로 해서 팔아볼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조카 한 녀석이 고3이었다. 추석 전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 사과를 조심스레 따서 예쁘게 포장해서 녀석에게 보내줘야겠다 다짐했다.